아침 일찍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움직이기가 너무 싫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모두 다 끄고 다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결국 더 이상 아침을 미룰 수 없을 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발을 내려다보니 발이 크게 부어있었다. 요즘 들어 유난히 발이 팅팅 붓고 열이 나서 수시로 냉찜질을 해주고 있었지만, 차갑게 젖은 수건을 발 위에 올려두면 30초도 안 되어 수건이 따뜻해졌다. 온몸이 찌뿌둥한 기분이 들어 기지개를 펴는 것조차 뻐근한 느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이전에 아팠던만큼 힘들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산티아고를 4일 정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경건한 기분이 든다.
갈리시아 지방의 아침은 거의 항상 흐린 것 같다. 양쪽으로 나있는 화살표에 잠시 멈칫했지만, 어느 쪽으로 가도 하나의 길로 합쳐지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순례자들이 남긴 물건들이 걸린 나무를 지나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 나간다. 가까운 카페에 들러 아침을 먹고, 너무나 소중해질 것 같은 이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간다. 앞서 간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기억을 따라 걷는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함께 전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오늘은 최대한 생각 없이 걷는 게 목표였다. 그동안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서 걸었기에 오늘만큼은 조금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하지만 석재오빠랑 이야기하면서 걷다 보니 연애관이나 이별에 대해서도 얘기하게 되었다. 나를 지나간 이들에 대해서나 헤어지게 된 계기 등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 걸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신혼여행을 순례길로 왔던 한국인 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누며 걷는 거겠지.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고통도 함께 나누며 행복하게 여행할 수 있는 사람.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길 수 있을까.
어둑어둑하던 날씨가 어느새 화창한 날씨로 바뀌었다. 오렌지에이드와 바게트를 점심으로 먹고 일어나는데 문득, 장애인이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 시청각장애와 자폐, 서번트 등에 관심이 많아서였을까,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들이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의 경우 자전거 길을 따라가거나 일부 국도를 이용해서 순례길을 걸으면 될 것 같았다. 청각장애인의 경우 순례길은 숲길과 산길이 많기 때문에 위협을 느낄 요소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느낌이다. 반면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순례길은 표지석과 화살표를 보고 방향을 찾아야 하며, 알베르게나 식당에 들어가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따로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행이 있어서 도움을 받는다면 편하겠지만 동행 없이 혼자 걷고 싶어 한다면 난이도가 급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의 경우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가 있다면 이러한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이 된다. GPS와 연동해 표지석의 위치와 방향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어플을 개발하면 된다. 또한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알베르게나 식당을 미리 예약해 두면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혼자서 순례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목적으로 순례길을 걷게 되는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800km의 길을 걸으며 만나게 되는 자신을 마주하는 목적이라면 기기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혼자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경우 해인사 소리길 일부 구간에 장애인 탐방 가능로가 설치되어 있다. 표지판에는 한글 위에 점자가 기록되어 있고, 휠체어나 유모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도 표시되어 있다. 한국의 사회적 기업 중에는 이런 뜻을 함께 하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가치를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나 표시들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편리한 시설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휠체어 통로가 유모차나 캐리어 통로로 종종 편리하게 사용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수화와 점자가 조금 더 널리 알려져서 모두가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ay)에 도착했다. 침대를 배정받고, 배낭 안의 모든 짐을 풀어놓았다. 짐을 공개하는 건 처음인데, 좌측 사진에 있는 짐이 내가 가진 모든 짐이다. 입고 있는 옷과 신발, 스틱을 제외하곤 진짜 저게 전부다. 분홍색 파우치엔 옷이 들어있고 하늘색 파우치엔 세면도구와 각종 잡다한 물품들이 들어있다. 왼쪽 빨간색 물건은 블루투스 키보드이고, 그 밑의 갈색 물건은 발가락 양말이다. 그 옆에는 침낭이 있고 돈이 들어있는 보조가방이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순례길에서 자주 보는 슈퍼마켓 중 하나는 Dia다. 조금 규모가 있는 마을이라면 항상 Dia가 있었는데, 여기서 장을 보기 위해 일부러 Dia 주변 알베르게를 찾기도 했다. 장을 보고 돌아와서 샐러드와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후식으로는 정말 맛있는 체리와 자두, 그리고 메론을 먹었고, 맛있는 아이스크림과 맛없는 초콜릿도 먹었다. 사랑하는 우니클라 우유와 물을 마셨고 순례길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맛있는 mahou맥주도 마셨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빨래를 정리하러 밖에 나갔다 왔는데, 문득 내 손과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자글자글 주름도 많고 마디도 굵은 데다 햇볕에 타서 새까맣게 된 50대 할머니 손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너무 못생긴 내 손. 예쁜 반지를 꼈을 때 대조되는 못생긴 손이 너무 싫어서 액세서리 중 유일하게 싫어하는 게 반지일 정도로 손을 부끄러워했는데, 그래도 뭐 내 손이니까. 나라도 예뻐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