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았다. 산티아고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이다. '산티아고 도착'이라는 미션을 달성한 나는 이제 자유다. 당장 오늘부터 한 걸음도 걷지 않아도 되고 허름한 옷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순례는 어제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끝이 났으며, 오늘부터 나는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로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벌써 들뜬 기분이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산티아고에서의 일정도 하루 더 길어졌다. 보통 산티아고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피스테라와 묵시아에 갈 지, 아니면 산티아고에서 하루를 더 보낼지 결정하게 된다. 피스테라와 묵시아는 스페인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0.00km 표지석이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들리는 곳이다. 그 곳에 가려면 걸어가거나 버스투어를 하는 방법이 있는데, 어쨌거나 둘 중 무엇을 선택해도 하루 이상 소비되는 건 확실하다. 산티아고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4일. 어제 도착해서 하루를 보냈고 마지막 날은 아침 일찍 공항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시간은 사실상 단 이틀, 오늘과 내일뿐이었다. 나는 어딘가를 여행할 때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보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그 주변을 구석구석까지 탐색하고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오늘과 내일 중 하루를 버스 안에 있는 것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스페인과 산티아고를 조금 더 깊게 보고 싶었다. 그래서 피스테라와 묵시아에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오늘과 내일은 일정이 없는 자유의 몸인데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걷게 되었다. 바로 이 식사권 때문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순례자 사무소에 들려 산티아고 완주 증명서를 받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소가 어딨는지 인터넷에 검색하던 중 어떤 정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완주 증명서를 줄 때 매일 오전 선착순 10명에게 근처 레스토랑의 점심 식사권을 준다는 정보였다. 5시 30분 쯤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하니 우리 외엔 아무도 없어서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겠다는 강한 의지가 꼭두새벽에 사람을 일어나게 하다니…. 하지만 10여 분 정도 지나자 아무도 없던 길가에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 외국인이 순례자 사무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그 외국인 바로 뒤에 줄을 섰다.
시간이 되자 순례자 사무소의 문이 열렸다. 사무소 안에는 6~7명의 직원이 있었고, 아침 일찍 도착한 우리를 환히 맞아주었다.
“Hola, Buen camino!”
“Congratulation!”
“You did it!!”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한 게 맞긴 맞구나.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순례자 사무소의 직원들은 수없이 많은 순례자들을 봐와서 감흥이 없을 법도 했지만, 그만큼 그들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결같은 축하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게 아닐까싶었다. 그들의 배려와 웃음에 감사 인사로 답하고 증명서 발급을 위한 몇 가지 정보를 주고 받았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걸어서 왔는지 자전거를 탔는지, 이름과 국적은 어떻게 되는지였다. 세요(스탬프)가 빼곡히 채워진 크레덴시알을 건네고 출발지와 도착지를 확인받았다. 생장에서부터 걸어온 나의 흔적이 이 크레덴시알 안에 녹아 있었다. 나의 떨리는 기분만큼이나 그들이 조심스레 꼭꼭 눌러 쓴 내 이름에는 빛이 가득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벅차올랐다. 799km를 걸어서 완주했다는 증명서를 받았다.
까미노 완주 증명서
산티아고 시내
알베르게로 돌아가서 낮잠이나 잘까 하다가 산티아고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말이 좋아 둘러보는 거지 사실은 그냥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아침을 먹고 성당 쪽으로 나왔다. 성당 앞에 방금 막 도착한 순례자들을 보니 어제의 내가 떠올랐다. 하루차 선배의 기분이 들어 으쓱으쓱했다. 매일 아침이 흐렸던 갈리시아 지방은 오늘도 여전히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흐린 날씨조차 예쁘게 보였다. 슬슬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아까 받았던 식사권을 사용하기 위해 레스토랑에 왔다. 예쁘게 세팅된 수저와 접시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기분이 좋았다. 에피타이저인 국과 또띠야를 먹고 메인으로 나온 갈비와 감자칩, 그리고 후식인 산티아고 케이크(아몬드 파이)를 먹었다. 일찍 온 순례자 10명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는데 생각보다 맛이 없어서 약간 실망했다. 양송이타파스를 먹으러 로그로뇨로 다시 가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점심까지 먹고 나니 더 할 일이 없어졌다. 산티아고에서의 소중한 나의 하루를 낮잠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구글 지도를 켜서 근처에 뭐가 있나 보던 중 석재 오빠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나와 달리 오빠는 아직 여행 일정이 남아있었기에 여행지에 맞는 옷을 새로 사야 한다고 했다. 찾아 보니 산티아고 근처에 대형 쇼핑몰이 있는데, 그곳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다. 딱히 살 건 없었지만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갈까 택시를 타고 갈까 고민하다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석재오빠는 버스 타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걷는 게 더 좋았다. 오늘은 날씨도 너무 좋고, 길도 너무 예뻤다.
2~3km를 걸어서 쇼핑몰에 도착했다. 평소 쇼핑에 취미가 없던 나는 석재오빠에게 1시간 뒤에 1층 로비에서 만나자고 하고 각자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살 게 딱히 없어서 매장 몇 군데만 구경하고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오빠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쇼핑몰을 둘러보는데 석재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쇼핑 다 했으면 이제 슬슬 알베르게로 돌아가자고 한다. 시간을 보니 2시간이 넘게 지나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손에 원피스 하나와 점프슈트 하나가 들려있었다.
오는 길에 택시를 탔는데, 정말 한 달 만에 자동차를 타 봤다. 이렇게 편리한 게 세상에 존재하다니 놀라웠다. 30분 간 걸었던 거리를 5분도 안 되어서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편하게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쇼핑한 걸 정리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다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러 저녁을 주문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적당히 들어 간 레스토랑에서 메뉴 델 까사(menu del casa)를 주문했다. 석재오빠는 오늘은 꼭 고기를 먹겠다고 해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메뉴 델 까사는 전식(에피타이저)-본식(메인메뉴)-후식(디저트)로 나오기 때문에 단일 요리를 먹는 시간에 비해 식사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다. 주문한 스테이크가 다 식어가는데도 메뉴 델 까사의 긴 식사시간을 생각해 음식 먹는 속도를 맞춰줬던 석재 오빠의 몸에 밴 배려는 정말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본인은 알고 있을까. 의도치 않은 자신의 배려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단걸. 내가 저런 배려를 갖추고 있었다면 온갖 생색을 다 냈지 않았을까. 반성, 또 반성하게 된다.
오늘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알베르게 로비로 내려왔다. 원래 같았으면 가볍게 술을 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했겠지만, 아까 저녁을 먹을 때 와인 한 잔에 얼굴이 빨개져서 추가로 주문한 맥주 한 캔을 다 마시지 못한 게 떠올랐다. 30일 넘게 연속으로 술을 마신 탓에 간이 안 좋아진 것 같다. 차마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마트에서 사온 과일을 먹으면서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고민했다. 석재오빠가 영화라도 한 편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사실 석재오빠는 산티아고를 걷는 내내 노트북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노트북 배터리충전기를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미리 보내놓았던 탓에 사실상 벽돌을 들고 다닌 것과 같았다. 오늘 드디어 우체국에서 충전기를 찾아와서 노트북을 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나의 산티아고' 라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 정보를 찾을 때 알게 된 영화였는데, 걷는 내내 생각날까 봐 일부러 보지 않았던 영화다. 약간은 미화된 장면도, 과장된 장면도 있었지만 내가 지나온 길이 영화에 그대로 녹아있는 걸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 석재오빠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 있는 쇼파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다. 노트북을 정리하고 석재오빠를 깨워 알베르게 3층에 있는 침대로 데려다 놓고 나는 다시 1층 로비로 내려왔다. 통금이 없던 알베르게였기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밤이 깊어 멀리 가진 않았고 알베르게 문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신나는 표정으로 지나갔고, 엄숙한 표정으로 배낭을 멘 사람들이 홀로 걸어가는 것도 간혹 볼 수 있었다. 순례의 끝을 함께 한 사람들과 또 다른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밝게 뜬 달과 별이 오늘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듯했다. 저 달과 별이 머무른 자리에 해가 떠오르면 나의 내일이 시작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