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일차. 순례길의 시작과 끝이 꿈이 아니라는 걸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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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산티아고에서의 두 번째 아침


오늘은 성당에서 미사를 듣기 위해 미사 시간에 맞춰 나왔다. 종교는 없지만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인만큼 산티아고 대성당에서의 미사는 참석하고 싶었다. 어제 순례자 사무소에서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선착순 10명 안에 든 순례자들은 당일 대성당 미사에서 본인의 이름이 읊어진다고 해서 많이 기대했었다. 하지만 막상 미사시간에 맞춰가니 사람이 너무 많아 미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입장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미사 시간보다 2~3시간 일찍 나와 성당 근처의 거리를 구경하면서 미사를 기다렸다. 미사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보였다. 미사 시간은 1시간 넘게 남아있었지만 성당 앞의 줄은 이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웅성웅성하는 소리 속에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온다.



?? : 언니!!!

나 : !!!! 기선씨!!! 잘 지냈어요??!!!


피레네산맥에서의 출발을 함께 했던 기선씨와 기선씨의 동행이 된 친구들이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목사님도 계셨고, 세계여행을 하던 친구도 있었다. 이젠 못 보는 게 아닌가 했던 사람들을 여기서 다시 보니 너무 반가웠다. 한편 그들도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끼면서 때로는 많이 힘들었겠지 하는 생각에 괜스레 코 끝이 찡하기도 했다. 반가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박물관처럼 만들어진 성당 내부는 촬영이 가능했다. 내가 신자였다면 성당의 상징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예쁜 오르골 파이프들과 성당의 천장 뿐이었다. 생각보다 밋밋한 천장이었다. 그 유명한 향로가 나왔다. 하지만 이번 미사는 향로 미사가 아니었는지 향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빵집에서 냄새가 가장 좋은 빵을 몇 개 사왔다. 전부 다 실패 했다. 심지어 몇 개는 곰팡이가 있었다. 짧게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역시나 오늘도 일정이 없었던 우리는 그냥 걷고 싶은 대로 아무 곳이나 갔다. 이틀 전에 왔던 공원 근처로 왔다. 오늘은 뭔가 놀이동산의 느낌이 가득했다. 솜사탕도 먹고 축구게임도 했다. 이틀 전에 이 공원, 이 자리에서 노을을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점차 서쪽으로 내려가는 노을빛이 산티아고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것 같아서 그랬나 보다. 석재오빠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틀 전에 멀리서 담배만 피웠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옆에 털썩 앉았다. 이 분은 평소에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면 몸이 베베 꼬였던 자칭 ‘전형적인 공대 남자’였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고마웠던 점들을 하나씩 말했다. 오빠가 나와 같이 걸어줘서, 같이 술 마셔줘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다고 했다. 오빠 역시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같이 걸어줘서, 같이 술 마셔줘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웠다고 한다.


해가 질 무렵 공원을 나섰다. 축제 기간이었는지 근처 야외무대에서 하는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는데 카톡이 왔다. 아까 낮에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연응씨였다. 기선씨처럼 피레네 첫날부터 알게 된 사이였다. 걸음 속도 차이가 많이 났음에도 33일의 순례길 내내 계속 마주쳐서 기억에 남았다. 알베르게 근처에서 잠깐 보기로 하고 20분가량 벤치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같이 알고 있는 사람이나 사건이 많아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걸 이해하고 있었다. 생장과 산티아고, 나의 순례길의 시작과 끝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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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밤을 영화와 함께 보내게 해 준 석재오빠는 이미 침낭과 쿠션 속에 파묻혀 있었고, 어제처럼 3층으로 올려보낸 뒤 혼자 남아 노트북과 음식들을 정리했다. 이제 내일이면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파리로 넘어가는 비행기에서 내가 지나온 길을 보게 되지 않을까. 파리에서 며칠을 보낸 다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볼 수 있겠지. 침실로 올라가서 짐을 미리 챙겨놔야겠다.



Adios Spain, Adios Santi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