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살아남는다. 이 문장은 신념이 아니라 관찰이다. 생존은 의미도,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작동 조건이다. 생명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남으려 하지 않는다. 살아남도록 이미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 동물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 질문은 생존이라는 구조 밖에 있다. 생존은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될 필요가 없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단순히 부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흐르는 현실을 고정하는 행위다. 고양이를 생각해보자. 이름이 붙기 전의 고양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털의 움직임이고, 소리의 진동이며, 접근과 회피가 반복되는 관계 속의 사건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건을 “고양이”라고 부른다. 이 순간 고양이는 더 이상 사건이 아니다. 개념이 된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실제 고양이가 죽어도 “고양이”라는 말은 남는다는 점이다. 라벨은 대상을 넘어 살아남는다. 공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룡을 보지 못했지만 ‘공룡’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공룡을 경험하기보다 공룡이라는 이름을 확인한다. 수많은 화석을 보고 난 뒤 “이건 공룡이다”라는 판단이 작동한다. 이때 우리는 현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위에 씌운 이름을 만난다. 이렇게 공룡이라는 이름을 만난 우리는 더 이상 불확실한 화석 앞에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동물도 구분은 한다. 위험과 안전, 먹이와 비먹이를 나눈다. 그러나 이것은 라벨링이 아니다. 동물의 구분은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종속되며, 개념으로 독립하지 않는다. 동물은 “이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이렇게 반응한다”고만 행동한다. 반면 인간의 라벨링은 다르다. 인간은 대상을 개념으로 고정하고, 그 개념을 대상보다 오래 살게 하며, 상황을 넘어 적용하고, 판단과 책임을 자동화한다. 그래서 인간의 라벨링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현실을 대신하는 장치다.
여기서 허구가 등장한다. 유발 노아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를 집단적으로 믿고, 그 허구에 따라 대규모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라는 것이다. 국가, 화폐, 법, 인권, 기업, 신. 이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현실에서 작동한다. 하라리의 통찰은 결정적이다. 그는 허구가 문명을 가능하게 한 엔진임을 포착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허구는 제도에만 머무르는가, 아니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전반에 이미 스며들어 있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허구의 스펙트럼은 확장된다.
허구를 제도에만 한정하지 말고, 정의 자체를 한 단계 넓혀보자. 허구란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믿음과 합의에 의해 작동하는 구조다. 이 정의를 적용하면 하라리가 말한 제도적 허구 너머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름 붙인 모든 것은 허구다. 고양이도, 사과도, 정상도, 병도, 성공도, 실패도, 그리고 나 자신도. 이것들은 실재 위에 얹힌 개념적 구조물이다.
허구는 거짓이 아니다. 허구는 현실을 대신해 작동하는 틀이다. 이를 가장 단순한 예로 보자.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컴퓨터로 아무리 정교하게 그린다 한들, 무한히 확대하면 그것은 픽셀의 집합이다. 수학적으로 완벽한 직선은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직선을 가정하지 않고는 건물을 세울 수도, 지도를 그릴 수도, 과학을 전개할 수도 없다. 직선은 허구지만, 필요한 허구다.
이 논리를 인간에게 적용해보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실존한다. 한 명의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이름과 몸과 이력을 가진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학자’, ‘철학자’, ‘미래학자’는 자연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라리라는 개인 위에 사회가 부여한 역할 라벨이다. 이 라벨은 실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믿기 때문에 작동한다.
이제 더 일상적인 예로 내려가 보자. 우리 집 주차장에 자주 보이는 한 마리의 길고양이는 실존한다. 그는 체온을 가지고, 배고픔을 느끼고, 비를 피해 움직인다. 그러나 ‘고양이’라는 것은 자연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만약 내가 그에게 ‘올드 듀터라노미’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올드 듀터라노미는 존재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수많은 개별 생명 위에 씌워진 하나의 개념적 덮개다. 이 덮개는 우리를 이해하게 돕지만, 동시에 실재를 가린다. 하라리가 포착한 허구는 집단의 질서를 만들었다. 여기서 확장된 허구는 개인의 인식, 정체성, 그리고 삶의 목표까지 만든다. 허구의 스펙트럼은 제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이 붙는 모든 지점으로 번져 나간다.
왜 인간은 이렇게까지 허구를 확장했을까. 답은 단순하다. 불안 때문이다. 이름 없는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고, 경계가 흐릿하며, 책임의 위치가 불명확하다. 인간은 이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말한다. “이건 고양이다.” “이건 정상이다.” “이건 실패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허구는 현실을 설명하기보다 불안을 외주화하는 장치다.
배가 고픈 생명이 있다. 인간이 아닌 생명은 식사를 하기 위해 움직인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건강을 위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식사를 하지 않기도 한다. 빵을 먹기 위해 빵집으로 향하던 한 사람은 길에서 곤경에 빠진 노인을 발견한다. 그는 노인을 돕고 답례로 사과를 하나 받는다. 이제 그는 생존을 위해 빵집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빵집으로 향한다. 인간은 분명 생존을 위해 움직이지만, 그 위에 덧씌워진 다른 목적들이 생존이라는 목표를 가리고 대체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특이성이 드러난다.
문제는 이 허구가 생존 위에까지 덮였다는 점이다. 인간은 더 이상 “살아남자”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산 것이다.” 이 순간 생존은 목표에서 밀려난다. 생존은 전제가 되고, 그 위에 허구적 목표들이 올라간다. 의미, 가치, 성공, 정체성. 인간의 삶은 이제 살아 있음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살아 있음을 향한다.
이 변형된 목표 구조 덕분에 인간은 생존보다 의미를 택하고, 손해를 알면서도 신념을 지키며, 목표 자체를 의심하고 폐기할 수 있다. 이것은 진화적 오류가 아니다. 허구를 목표로 삼을 수 있게 된 결과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조는 인간을 가장 취약한 존재로 만든다.
동물은 생존이 불가능해지면 끝난다. 목표는 하나이고, 종료는 하나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허구가 무너질 때 죽는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 더 죽는다. 의미가 붕괴되고, 정체성이 작동하지 않으며, “왜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이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다. 서사의 죽음이다. 하라리는 허구가 사회를 유지하는 방식은 설명했지만, 허구가 개인 내부에서 붕괴될 때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한다.
여러 사유 전통들은 이 한계를 각기 다른 언어로 포착해왔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묶을 때 주의가 필요하다. 이들이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기보다, 같은 한계를 인식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니체에게 이름과 가치는 허구다. 그러나 그는 허구를 제거하지 않는다.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 허구를 감당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라벨을 창조해 세계에 찍어 누르는 존재, 그를 니체는 초인이라 불렀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허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허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허구를 사용한다.
불교에서 라벨은 망상이다. 사물은 이름 때문에 고통을 발생시킨다. 보살은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보다 이름을 붙이려는 충동 자체를 내려놓는다. 그 핵심은 여실지견, 있는 그대로 본다는 수행이다. 불교는 허구를 더 정교하게 만들지 않는다. 허구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한다.
베단타에서 라벨은 마야다. 그러나 마야는 단순한 오류나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브라만, 즉 실재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다. 지반묵타는 허구를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는 허구를 실재의 한 국면으로 통합한다. 허구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투명해져야 할 층위다.
여기에 기독교를 더하면 구조는 더욱 선명해진다. 기독교에서 문제는 라벨이 아니라 우상이다. 성경은 세계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름 앞에 무릎 꿇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도달한 상태’를 명사로 라벨링하지 않는다. 대신 삶의 방향을 동사로 제시한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아가페).”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황금률).” 기독교는 어디에 도달했는가를 묻지 않는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라벨이 삶을 대신하려는 순간마다 그 라벨을 행위로 해체한다.
이 전통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이들은 모두 라벨링의 폭력성, 혹은 라벨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너머를 지향한다. 과거의 가르침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라벨링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라벨링했음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가 위험하다. 나는 이 상태를 부활이라 라벨링하겠다. 부활이란 허구를 부정하는 상태가 아니다. 허구가 삶을 대신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다. 부활한 인간은 보통 덜 단정적이고, 덜 확신에 차 있으며, 덜 설명하려 든다. 그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사는 상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례이기에 하나의 예시로 든다.
히잡에 대한 논쟁은 흔히 ‘종교적 자유 vs 여성 억압’이라는 이분법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이 대립은 히잡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목적을 거의 묻지 않는다. 쿠란 제33장 59절은 히잡(당시의 질밥)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언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과 믿음직한 여성들에게 그들의 겉옷을 몸에 두르라고 말하라. 그렇게 함이 그들이 인식되게 하여 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데 가장 적절하니라.” (33:59)
이 구절에서 히잡은 도덕적 우월성의 과시도, 여성을 감추기 위한 통제 장치도 아니다. 핵심은 두 단어다. 인식(Recognition)과 보호(Protection). 히잡은 “이 여성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회적 신호였다. 동시에 공동체가 약자를 존중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즉, 히잡은 본래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공공의 약속이었다.
문제는 율법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목적이 잊힌 채, 수단만 절대화되는 순간이다. 2022년 이란에서 벌어진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의 히잡 시위는 히잡이 더 이상 ‘존중과 보호의 신호’로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이 지점에서 히잡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리는 표식”이 아니라 국가가 복종 여부를 판별하기 위한 검사 도구가 되었다. 여기서 율법은 공존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통제를 위한 장치로 전도된다.
히잡이 선택의 윤리가 아니라 강제의 규범이 되는 순간, 그 상징은 완전히 반전된다. 존중을 위해 만들어진 표식이 존재를 검열하는 라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이 규범은 공동체가 약자를 더 보호하도록 만드는가, 아니면 권력이 개인을 더 쉽게 식별하고 처벌하도록 만드는가? 율법은 공존을 위해 존재할 수도 있고, 억압을 위해 작동할 수도 있다. 차이는 내용이 아니라 작동 방식에 있다. 목적이 살아 있을 때 율법은 보호가 된다. 목적이 사라질 때 율법은 폭력이 된다.
라벨의 문제로 다시 돌아오면 히잡은 하나의 라벨이다. 라벨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라벨이 왜 붙여졌는지를 아무도 묻지 않게 되는 순간, 그 라벨은 우상이 된다. 앞서 말했듯, 라벨링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라벨링했음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가 위험하다. 율법 역시 마찬가지다. 율법을 따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묻지 않게 되는 순간, 그 율법은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다.
비단 율법뿐 아니라 법, 규칙, 도덕, 정의도 목적을 잃는 순간 폭력이 될 수 있다.
하라리가 말한 허구는 문명을 만들었다. 허구의 스펙트럼을 넓히면 그 허구는 개인의 삶과 죽음까지 형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름 붙인 모든 것은 허구다. 이 허구는 인간을 특별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인간을 허구 붕괴에 가장 취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유일하게 한 번 더 죽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되었다. 이것은 축복도 저주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라는 종의 구조다.
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을 이렇게 이해한다. 가브리엘은 허구가 실재를 잠식하는 위험을 정확히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의미의 장’이라는 철저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그 장치 덕분에 실재는 허구와 구별되어 보호되고, “모든 것이 허구다”라는 급진적 상대주의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제어된다.
그러나 나는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다른 방향을 택한다. 만약 “모든 것이 허구다”라는 주장이라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 입장은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모든 것은 실재한다. 다만, 우리가 이름 붙인 모든 것은 허구다. 허구란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를 다루기 위해 인간이 만든 도구다. 문제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 허구를 허구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의 장이라는 완충 장치라기보다, 라벨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인식의 태도다. 나는 허구를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허구가 실재를 대신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의심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