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광기에 관하여

by 정승연

이 글은 이전 에세이인 『정의라는 환상, 희생이라는 실존 그리고 이기적인 존중』에서 다룬 통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 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도록 쓰였지만, 앞선 논의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어떤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경하거나 방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이 글이 적대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의지하던 익숙한 이해의 출입구를 건너뛰어 곧장 본질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1. 광기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광기는 의학적 진단이나 병리학적 범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상태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를 오직 나 혼자서만 떠받쳐야 한다고 느끼는 고립감, 내 말이 이해되지 않을 때 더 강하고 크게 증명해야만 한다고 믿는 강박, 그리고 내가 틀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존재 자체가 무너질 것만 같은 극도의 긴장 상태 말입니다. 광기는 비이성의 산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과도한 이성의 하중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2. 고립의 축적이 만드는 세계

광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불운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겹의 조건 속에서 천천히 자라납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받지 못했던 경험, 의도가 왜곡되거나 의심받았던 기억, 그리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문제를 홀로 오랫동안 붙들어야 했던 상황들이 광기의 토양이 됩니다. 어느 순간 사람은 “아무도 이것을 보지 못한다면 끝까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지점부터 사고는 닫히고 확신은 단단해지며, 세계는 나를 향한 적대적인 구조로 재편됩니다. 광기는 갑작스러운 폭발이 아니라 고립이 켜켜이 쌓인 결과입니다.


3. 인정의 구체적인 의미

이 글에서 말하는 인정은 단순한 칭찬이나 동의, 혹은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상대의 말을 왜곡하지 않는 것, 상대의 의도에 악의를 가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설령 동의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정은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고뇌하며 생각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확인해 주는 행위입니다. 그 확인 한 문장이 광기의 압력을 낮추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4. 해가 되는 인정과 도움이 되는 인정

하지만 모든 인정이 약이 되지는 않습니다. 비판 없는 맹목적인 동의나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는 공감은 광기를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안착시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확신은 수정 불가능한 신념으로 굳어지고, 혼자 짊어졌던 세계는 집단적인 메아리가 되어 더욱 견고해질 뿐입니다.

반면 도움이 되는 인정은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불일치와 질문, 판단의 유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넘지 않는 선이 있습니다. 끝까지 경청하고, 의도를 단정 짓지 않으며, 생각과 사람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정은 상대에게 “이 생각을 혼자서만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것이 가능해질 때 광기는 폭주하는 파괴적인 힘에서 견딜 수 있는 긴장으로 변화합니다.


5. 우리가 줄 수 있는 인정의 한계

우리는 설득으로 광기를 치료하거나 논리로 그것을 부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매우 제한적입니다. 해결을 요구하지 않고, 결론을 강요하지 않으며, 대화를 끊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을 통제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정해 주겠다”는 태도는 인정을 도구화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치는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않겠다”는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6. 인정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입니다

어차피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굳이 인정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시도는 오직 그 사람을 바꾸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입니다. 내가 상대를 악마로 만들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광기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를 악마로 규정하는 순간 세계는 극도로 단순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편리한 자리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 자리는 광기를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광기와 가장 닮아 있는 자리입니다.


작은 에필로그

얼마 전 한 아파트 단지에서 정신적 혼란 상태로 추정되는 성인이 모르는 아이의 집까지 따라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비극적인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 과정에서 드러난 갈등의 구조에 주목했습니다. 해당 성인은 경찰에게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의 내면 세계에 접근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의도적 거짓인지 진심 어린 믿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정말 그렇게 믿었다면, 그의 내부 논리 안에서 우리는 그의 아이를 빼앗은 가해자가 됩니다. 이것이 그의 행동을 용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세계에는 그만의 일관된 논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또한 사건 이후 아파트 공동체는 집값 하락을 걱정하는 소수와 사건 공개를 주장하는 다수로 나뉘어 대립했습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에 공감하지만, 집값을 걱정한 이들을 악마라고 부르지는 않겠습니다. 평생의 목표가 집 한 채 마련이었을 누군가에게 그 불안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며, 그가 살아온 삶의 맥락 속에서는 충분히 일관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일을 멈추고 그들을 인정하는 불편함을 견디는 순간, 나의 분노는 연민에 가까운 감정으로 변화합니다. 이것은 동의도 용서도 아닙니다. 그저 그들의 존재 층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정'일 뿐입니다. 나는 이러한 인정을 통해, 종종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 세계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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