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환상, 희생이라는 실존 그리고 이기적인 존중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를 읽고

by 정승연

1. 나는 마이클 샌델의 책을 좋아한다 — 그가 결론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샌델은 끊임없이 독자에게 사례를 제시한다. 트롤리 문제, 장기 시장, 대리모, 병역 기피, 능력주의.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이 순간, 무엇이 옳은가? 우리가 답하려는 순간, 익숙한 기준들이 소환된다. 다수결, 효율성, 자유, 효용, 무지의 베일. 샌델은 이 기준들을 하나씩 꺼내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해체한다. 다수결은 언제든 다수의 폭정이 될 수 있고, 무지의 베일은 현실의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추상이며, 중립성은 종종 책임을 회피하는 또 다른 이름이 된다. 많은 독자들은 이 과정을 불편해한다. 판단하려다 반복해서 실패하고, 결국 기대어 설 수 있는 결론 없이 남겨진다. 그러나 나는 이 방식이 좋다.


2. 이 책의 핵심은 “정답이 없다”가 아니라 “정답이 없는 상태”다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 제시된 질문들에는 옳은 답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샌델이 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그가 몰라서가 아니다. 끝까지 “답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그의 방법이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바로 그것이다. 정답은 언제나 누군가에게만 정답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에는 정답이 없다.


3. 나에게 최적인 것이 타인에게도 최적일 이유는 없다

내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이 나에게는 최적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도 반드시 밥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빵일 수 있고, 다이어트 중인 사람에게는 배고픔 자체가 극복해야 할 욕망일 수 있다. 우리가 이 단순한 사실을 잊는 순간, 선의는 쉽게 강제가 된다. 그리고 강제는, 의도가 무엇이든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옳음”보다 먼저 “강요하지 않음”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4. 그렇다면 공동선은 무의미한가?

정답이 없다면, 공동선을 논하는 행위 자체가 공허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는 불가능할지라도,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결과는 가능하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5. 수용은 언제나 희생 위에 세워진다

수용 가능한 결론에는 누군가의 포기가 담겨 있다. 나는 밥을 선택했고, 그 선택 안에는 내가 포기한 빵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은 빵을 포기하며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라는 가치를 그 위에 두었기에 그 희생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러나 선택 이후 만족이 따르지 않는 순간, 우리는 포기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밥을 선택하고 만족하지 못하면 빵을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 인정을 위해 희생했다면, 그 인정이 오지 않는 순간 후회는 더 깊어진다. 후회는 물론 자신의 선택에 대한 비용이다. 그러나 타인의 희생이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는 순간, 그 후회는 원망으로 변할 가능성을 갖는다. 모든 후회가 원망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 하나의 원망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결론은 더 이상 정의라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6. 트롤리 문제와 공동선의 비극성

『정의란 무엇인가』는 트롤리 문제를 제시한다. 한 사람을 희생할 것인가, 여럿을 희생할 것인가.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희생하겠다고 선택해도, 그 한 사람의 부모는 여럿을 선택할 수 있다. 혹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도 여럿을 살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깊이 비극적이다. 그러나 희생된 사람이 그 부모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고 이해한다면, 최악의 결과는 피할 수 없는 비극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공동선은 필요하다. 그러나 존중이 선행되지 않은 공동선은 지탱될 수 없다.


7. 존중 없는 공동선은 가능한가?

여기서 나는 묻고 싶다. 존중이 제거된 공동선이란, 욕망이 제거된 자아와 무엇이 다른가? 자아는 욕망을 통해 존재한다. 따라서 기대는 필연적이다. 기대가 있는 곳에서 갈등과 실망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존중 없는 공동선은 갈등 없는 공동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대 없는 공동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대 없는 공동선은 욕망 없는 자아를 전제한다. 그런 자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욕망 없는 자아는 성숙한 인간이 아니라 반응하지 않는 존재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존중이 제거된 공동선은 윤리의 완성이 아니라 갈등을 지워 구조만 유지하는 체계일 뿐이다. 트롤리 사건의 희생자를 생존자들이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의 선택이 “공동선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말로만 정당화된다면, 그 부모는 결국 무너질 것이다.


8. 공동선이 폭력이 되는 순간

공동선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생이 전제처럼 당연시되는 순간, 공동선은 즉시 폭력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억해야 한다. 선택되지 못한 것, 놓여진 것, 그 선택이 요구한 비용을. 기억이 멈추는 순간, 공동선은 토론에서 구조로 바뀌고, 그 구조는 너무도 쉽게 누군가를 침묵시킨다. 트롤리 부모에게 과도한 위로를 건네는 것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행위일 때가 많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과도한 위로가 아니라, 절제된 감사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조심스러운 지지의 말이다. 그리고 그 부모가 그 지지를 면죄가 아니라 진정한 존중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최악의 결과는 비극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9. 답 없는 세계에서 남는 태도

나는 도덕에 정답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타인의 선택이 나의 편의를 위해 소비되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자각하려는 태도—그것이야말로 답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그리고 아마 샌델이 끝내 결론을 쓰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10.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한 번 말한다. 공동선은 필요하다. 그러나 타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공동선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붕괴하는 공동선 속에서 우리가 끝내 붙들 수 있는 것은 존중이다. 내가 상상하는 세계(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세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안다. 만약 내가 트롤리 방향을 정하는 사람 옆에 서 있고, 그 선택이 내 가족을 위협한다면, 나는 그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사회에 기여했다고 믿을수록, 그 원망은 더 커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존중이 원망을 없앤다고 믿지 않는다. 존중은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다. 비극을 무효화하는 해법도 아니다. 그러나 존중은 적어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 내 자신의 불안을 낮추는 데에는 분명히 유용하다. 이 글은 세상을 설득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정렬하기 위해 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당신을 존중할 때, 당신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에필로그

정의라는 지옥 속에서 나는 존중이라는 나만의 천국을 짓는다. 이 지옥 속에서 당신이 당신만의 천국을 짓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이 지어놓은 임시 거처에서 잠시 숨을 고르든, 그 선택을 나는 존중한다. 천국을 짓는 일은 반드시 즉각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P.S.

만약 우리 모두가 정의라는 지옥 안에서 각자의 천국을 짓는다면,

그곳은 지옥일까, 아니면 천국일까?

나는 우리의 미래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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