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외출을 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서둘러 준비하느라 아침 식사를 거른 채 집을 나섰고, 우리는 곧 첫째 아이의 배고프다는 투정을 들어야 했다.
아침을 차릴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차에 오른 뒤 김밥집에서 김밥을 포장하기로 했다.
배고프다며 투정을 부리던 아이를 보며 우리는 생각보다 넉넉하게 주문했다.
그런데 아이는 김밥을 조금 먹더니 말했다.
이제 배부르다고.
우리는 화가 났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왜 화가 난 걸까.
왜 김밥을 그렇게 많이 샀을까.
아이는 아직 언어가 충분하지 않다.
배고픔, 출출함, 그저 입이 심심한 상태를 구별해 표현하기 어렵다.
아이에게 그것들은 모두
그저 “배고파”라는 말로 수렴된다.
어쩌면 그 짜증은 배고픔이 아니라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투정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극심한 배고픔을 느끼고 있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 때문에 김밥을 과하게 구매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틀렸다는 실망은
아이를 향한 분노로 바뀌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갈등이 오늘만의 일일까 싶었다.
우리의 언어는 생각보다 좁다.
Thank you도, appreciate도
우리는 모두 ‘감사합니다’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가치나 격식 같은 단어를 덧붙인다.
문제는 그 단어들조차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는 점이다.
성인에게는 돈이 분유보다 가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신생아에게는 돈보다 분유가 훨씬 중요하다.
돈을 좇는 사람에게 가치는 돈으로 환원되고,
행복을 좇는 사람에게 가치는 기쁨으로 환원된다.
결국 ‘가치’라는 단어 자체는
아무 힘도 가지지 못한다.
의미는 언제나 맥락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그 맥락에는
단어의 나열(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까지 포함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언어의 불완전함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시를 쓰고, 소설을 만들고, 영화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언어가 충분히 정확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상대의 말을 오해한 것이 사실은 나 자신이었음에도
그 책임을 종종 상대에게 돌린다.
오늘 이 글에 결론은 없다.
그저
오늘 겪은 이 사소한 경험을
당신과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