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을 당하는 우리가 명심해야할 몇 가지

어느 선동꾼의 고백

by 정승연

주의: 이 글은 이미 삶의 지지대가 무너진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우상을 의심하는 일은 자유로움이 아니라 공허를 먼저 데려오는 경우도 많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질문이 아니라 회복이나 휴식이라면, 이 글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괜찮다. 질문은 언제나 가능해야 하지만, 언제나 지금일 필요는 없다.


1. 인간은 선동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패배 선언도, 냉소도 아니다. 지능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불안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불안을 줄여주는 말, 사람, 설명을 자연스럽게 신뢰한다. 그 신뢰는 대부분 생각보다 먼저 작동한다. 그래서 선동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늘 발생하는 구조에 가깝다. 선동과 설득은 작동 방식에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설득은 타인의 불안을 대신 처리해주며 그 사람에게 잠시 [1]우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이다. 우상이 작동하는 한, 우리는 선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선동에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선동만 포함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설득하는 방식, 즉 자기합리화 또한 선동의 한 형태다. “이 정도는 괜찮아”, “다들 이렇게 해”, “어쩔 수 없었어”라는 말들은 대부분 악의 없이 시작되지만, 불안을 빠르게 정리해주는 순간 사유는 멈춘다. 우리는 선동에 빠질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의심 없이 유지하는 것이다.


2. 의심이 필요한 이유: 의심은 불신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선동의 면역이 아니라 의심이다. 의심은 불신이 아니며,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선언도 아니다. 의심이란 결론을 조금 늦추는 습관에 가깝다. 하지만 질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들이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안정이라는 마약을 끊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불안을 줄여주는 설명, 명확한 결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작동하는 세계를 원한다. 누군가 대신 정리해준 삶은 편하며, 가능한 한 적은 선택으로 빨리 불안을 낮추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질문은 그 편의를 거부한다. 질문은 불안을 진정제 없이 마주하게 만든다. 특히 “이 행동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습관도, 의무도, 타인의 기대도 쉽게 변명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질문은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 대신 스스로를 발가벗긴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편해지는 세상에서 질문은 인생을 수작업으로 살아가라는 요구처럼 느껴진다. 매번 멈추고, 확인하고, 선택해야 하기에 귀찮고 위험하며 종종 외롭다. 그럼에도 질문이 기술이 되고 습관이 된다면 삶의 위치는 조금 달라진다. 선동이나 불안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다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대신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고 선택하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3. 교육과 세뇌는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여기서 교육과 세뇌의 문제를 보게 된다. 우리는 흔히 교육은 옳고 세뇌는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둘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불안을 다루고 기준을 제공하며 선택지를 정리해준다. 특히 교육은 성숙한 자아가 형성되기도 전에 선택지를 주입한다. 아이는 아직 질문할 언어도, 의심할 거리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생각하라”는 구조를 먼저 배운다. 이 과정은 피할 수 없으며 완전히 자유로운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주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주입이 언제까지 유일한 선택지로 남는가이다.

이를 일상적인 예로 보자. 한국의 온돌 문화에서 서양인이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을 때 한국인은 그 이유를 묻는다. 서양인은 위생이나 편의를 말할 수 있고, 한국인은 온돌 구조 때문에 신발을 벗는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들은 서양인은 납득하고 신발을 벗을 수도 있고, 개인적 불편함을 이유로 벗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다. 신발을 벗고 안 벗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에 대해 질문하고, 이유를 설명하고, 다른 선택을 허용하는가이다. 질문과 토론이 자연스럽게 수용된다면 교육이라 부를 수 있지만, “원래 그런 거다”, “묻지 마라”는 반응만 돌아온다면 그 순간 교육은 세뇌와 구분되기 어려워진다. 차이는 행위가 아니라 질문의 생존 여부에 있다. 질문이 허용되는 교육은 언젠가 그 기준을 떠나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질문이 제거된 교육은 기준이 사라지는 순간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 질문은 자아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출구다.


4. 질문은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감당되는 것이다

질문이 사라지는 구조는 누군가 막아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갈릴레오의 시대를 떠올려보자. 그가 던진 것은 “정말로 그런가?”라는 질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무지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충분히 교육받은 상태였다. 우주의 작동 방식에 대한 설명은 오랫동안 불안을 잘 처리해주었기에, 갈릴레오의 질문은 진리가 아닌 안정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과학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기존의 과학에 세뇌되어 있었기에 질문을 거부했다.

중요한 점은 질문을 억압한 것이 권력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질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한 수많은 수용자 또한 그 구조를 유지했다. 후대의 인간이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선동자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열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동과 교육의 문제는 말하는 자의 책임만큼이나 듣는 자의 태도 역시 중요하다. 선동자는 질문을 닫으려 하고 교육자는 열어두려 하지만, 수용자가 “묻지 않기로 선택”하는 순간 그 차이는 무력해진다. 질문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것이다.


5.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절대적인 목적 하나만을 붙잡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 행동은 나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가, 이 작은 기쁨들은 모여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가. 이 질문들은 정답을 주지 않지만 방향을 조금 늦춘다. 그리고 방향이 늦춰지는 순간, 선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나를 대신하여 결정하지는 못한다.


6. 이 글에 대하여

여기까지 와서 분명히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글조차 선동이라는 점이다. 이 글 역시 하나의 프레임을 제시하고 하나의 시선을 권한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이 글을 읽을 때조차 판단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이 글이 주는 안도감이나 동의조차 한 번쯤은 의심해도 괜찮다. 나는 정답을 제시하려 하지 않으며, 다만 자동으로 작동하는 파괴를 잠시 멈추는 기술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선동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문제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질문을 붙잡고 사느냐이다. 또한, 선동당한 채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반드시 불행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정리된 세계 속에서 안정을 얻고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질문하지 않는 자 또한 존중한다. 질문은 의무가 아니며 각성은 미덕이 아니다. 다만 그 상태가 본인의 선택이라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과 결과 또한 감당할 몫이 된다. 이 글이 누군가를 설득했다면 그마저도 오래 붙잡고 싶지 않다. 질문이 남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당신의 질문은 나의 선동을 교육으로 전환시켜준다. 당신의 존재에 감사하다.


에필로그

질문하는 당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확신해 줄 수는 없다. 그 말 역시 또 하나의 설득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험상 질문하는 삶은 복권 당첨처럼 삶이 쉬워지거나 불안이 사라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부터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기쁨에 이유 없이 감사하게 되었고, 내 삶의 흐름을 완전히 타인의 손에 맡기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 삶은 한마디로 ‘고된 축복’이었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축복이었다. 질문이라는 선택이 당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으나, 나의 경험이 하나의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의 문구를 읽었음에도 멈추지 못한 당신을 위한 참견

여기까지 왔다면 당신은 멈추고 싶었지만 멈추지 못했거나,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알면서도 끝까지 읽어버린 사람일 것이다. 그 선택을 나는 가볍게 보지 않는다. 이 글은 우상을 건드리고 지지대를 흔들며 질문이라는 불편한 도구를 꺼내 든다. 이미 마음이 무너진 상태라면 이 글은 위로가 아니라 부담일 수 있다.

지금 당신에게 질문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질문하지 못하는 상태는 패배나 나약함이 아니라 종종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만약 이 글을 읽으며 공허함이 커졌거나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고 있다면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다. 우상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혼자 버티거나 도움을 거부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늘은 질문 대신 숨을 고르는 날일 수도 있고, 의심 대신 버티는 것이 더 정직한 선택일 수도 있다. 이 글이 당신을 앞으로 밀어내기보다 잠시 멈추게 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끝까지 읽은 당신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감당하려 했고,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다.


[1]이 글에서 우상이란 종교적 의미에서 벗어나 의지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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