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이와 조금 더 잘 이야기하고 싶은 부모님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두 가지 방식으로 풀어 썼습니다.
1부는 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졌는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는 글이고,
2부는 아이의 마음과 내 마음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쓴 이야기입니다.
같은 질문을 다른 언어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요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어휘력이 떨어졌다는 우려가 자주 들린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독서량 부족에서 찾는다. 책을 덜 읽으니 아는 단어가 줄었고, 그래서 표현력이 약해졌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진단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다고 어휘력이 회복될까? 질 낮은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양적 독서는 개인의 어휘를 조금 늘릴 수는 있어도 사회 전체의 언어 능력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문제는 우리가 아는 단어의 개수가 아니라, 언어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변했다는 데 있다.
어휘력은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내 생각과 감정을 잘게 나누어 구분하는 능력, 다시 말해 생각의 해상도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를 떠올려 보자. 그 안에는 실망, 피로, 기대의 붕괴, 혹은 상대가 내 선을 넘었다는 불쾌감이 뒤섞여 있다. 이 결을 구분할 언어가 없다면 그 복잡한 경험은 결국 하나의 말로 수렴된다. “아, 짜증나.” 혹은 “개짜증나.”
이 순간부터 소통은 가능하지만 이해는 불가능해진다. 나는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할 수 없고, 상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다. 대화는 겉돌고 오해는 쌓이며 관계는 쉽게 충돌로 향한다. 어휘력의 감소는 결국 인간관계를 단순한 반응의 연속으로 만든다.
나는 이 지점에서 어휘력의 문제를 철학으로 가져오고 싶다. 철학은 원래 누군가의 이름이나 이론을 외우는 일이 아니었다.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붙잡고 앉아 있는 시간에 가까웠다.
나는 왜 이렇게 느끼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이 질문 앞에서 자주 멈춰 섰다. 느끼고는 있지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언어가 확장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갈망이 비유를 만들고, 이야기를 낳고, 때로는 시가 되었다. 철학은 지식을 축적하기 이전에, 나를 설명하려는 노력이었다.
어느 순간 철학은 대학 안으로 들어갔다. 철학자는 누구이며 어떤 이론을 주장했고 그것이 어떤 체계에 속하는지를 배우는 학문이 되었다. 질문은 경험이 아니라 시험 문제가 되었고, 철학은 태도보다 지식 목록에 가까워졌다.
물론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개념은 정밀해졌고 논리는 검증되었으며, 수많은 오류와 독단이 비판 속에서 수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변화도 일어났다. 질문은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설명해야 할 지식이 되었고, 누가 무엇을 말했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났다. 문제는 철학이 학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태도로서의 철학이 함께 사라졌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의 어휘력이 빈약해진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더 이상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분석하기보다 즉각 반응하고, 상황을 이해하기보다 빠르게 판단한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언어는 압축되고 감정은 극단화된다.
좋다 아니면 최악이다. 기쁘다 아니면 짜증난다. 그 사이에 존재하던 수많은 언어들이 조용히 사라진다.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은 정확한 표현을 고르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철학적 갈망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그는 단어 하나를 던지는 대신 상대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내 말을 경청해줘.” 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 이야기를 조금만 집중해서 들어주지 않겠어?”
전자가 지도를 잘 읽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길을 만드는 사람에 가깝다. 무엇이 우월한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도를 읽는 능력은 공학, 법률, 의학처럼 협업이 필요한 분야에서 중요하다. 반대로 길을 만드는 태도는 소설과 시, 그리고 관계 속에서 더 큰 힘을 가진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단어를 모르면 표현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과거에는 개인이 머릿속에 거대한 사전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호한 감정을 설명하면 AI는 수많은 표현을 제시한다. 단어를 찾는 일 자체는 점점 쉬워지고 있다.
과거에는 타인의 방어기제에 막혀 철학적 대화가 어려웠다면, 지금은 감정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만으로도 AI가 구조를 잡아 준다. 상대의 방어를 지나기 위해 말을 고르는 부담 역시 줄어들었다. 하지만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다. AI에 의존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는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나를 비판해 달라고. 그리고 때로 AI는 자기합리화가 어려울 만큼 냉정한 질문을 던지는 대화 상대가 되기도 한다. AI는 문장을 제안할 수 있지만, 갈망을 대신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이 글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다른 한쪽이다. 삶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태도,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노력.
어휘력의 감소는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해상도가 낮아지는 문제이며, 결국 나를 잃어버리는 문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단어 시험이 아니라 다시 묻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상대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언어는 돌아온다. 언어는 결국, 누군가에게 닿고 싶을 때 다시 자라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비교적 적은 인간관계 속에서 깊은 관계를 맺어 왔던 과거의 사회를 전제로, 어휘력의 감소를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다르다. SNS와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며, 동시에 이전보다 얕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어휘력의 단순한 감소를 말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적응 혹은 진화로 볼 수도 있다. 수많은 관계를 빠르게 유지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세밀한 표현보다 자극적이고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언어가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짧고 강한 표현, 압축된 감정 언어는 어쩌면 빈곤의 결과가 아니라 속도와 효율을 선택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우려하는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사회관계망 속의 얕은 관계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는 어느 정도 구분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빠른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가 모든 관계로 확장될 때,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관계는 타인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을 구분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언어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어휘력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석] 사피어-워프 가설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강한 형태의 주장은 폐기되었지만, 언어가 사고의 습관을 형성한다는 관점은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한편 인지언어학은 언어가 사용 압력 속에서 변화하고 확장된다고 본다. 나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보다 먼저,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갈망이 언어를 밀어 올린다고 믿는다.
요즘 우리는 서로 대화는 많이 하지만, 정작 상대방이 어떤 마음인지는 잘 모를 때가 많아요.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이 단어를 너무 모른다고 걱정하며 "책을 많이 읽어라"라고 말하죠.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단어를 많이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언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에요.
어휘력이 좋다는 건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게 아니예요.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선명하게 보는 능력이에요. 이걸 **‘마음의 화질’**이라고 해볼까요?
누군가 때문에 속상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안에는 "나를 무시해서 슬퍼", "피곤해서 쉬고 싶어", "나만의 시간을 방해받아 화가 나" 같은 여러 마음이 섞여 있어요. 그런데 이걸 설명할 줄 모르면 우리는 그냥 한마디로 뭉뚱그려 버려요. “아, 짜증나!” 혹은 “개짜증나!”
이렇게 말하면 대화는 멈춰버려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고, 상대방도 내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죠. 결국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딪히기만 해요. 어휘력이 부족해지면 우리는 "짜증나"라는 좁은 감옥에 갇히게 돼요.
철학은 원래 어려운 공부가 아니었어요. 마음은 답답한데 입 밖으로 말이 잘 안 나올 때, 가만히 앉아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간이었죠. "나는 왜 이렇게 느끼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옛날 사람들도 이 질문 앞에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딱 맞는 말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내 진심을 어떻게든 전하려고 재미있는 비유도 만들고, 이야기도 만들고, 예쁜 시도 썼어요. 철학은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예쁜 노력이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철학이 학교 숙제가 되어버렸어요. 유명한 철학자 이름을 외우고 시험 문제를 푸는 과목이 된 거죠. 이제 철학은 내 삶의 고민이 아니라, 정답을 맞춰야 하는 지식 목록이 됐어요.
물론 철학 공부를 통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 건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걸 잃었어요. 바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태도예요. "유명한 누가 뭐라고 했지?"가 중요해지면서, 정작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지?"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나 버린 거예요.
지금 우리가 단어를 적게 쓰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더 이상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보다 그냥 화부터 내고, 상황을 이해하기보다 "이건 나빠!"라고 빠르게 판단해버리죠.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주 짧고 강한 말들만 남아요. 좋다 아니면 최악이다. 기쁘다 아니면 짜증난다. 그 사이에 있는 수만 가지 무지개 색깔 같은 마음의 언어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어요.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은 상황에 딱 맞는 단어를 쏙쏙 골라 쓰는 데 집중해요. 이건 '지도'를 잘 읽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마음을 전하려는 사람은 달라요. 그는 단어 하나를 던지기보다 상대방을 자기 마음속으로 초대하려고 해요.
어떤 사람은 "내 말을 경청해 줘(잘 들어줘)"라고 딱딱하게 말하겠지만, 마음을 전하려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내 이야기를 조금만 집중해서 들어주지 않을래?”
전자가 지도를 잘 읽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상대방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에요. 지도를 읽는 건 정확한 일이 필요한 곳에서 중요하겠지만, 길을 만드는 태도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해요.
어떤 사람들은 단어를 모르면 아예 말을 못 하지 않느냐고 걱정해요. 하지만 지금은 인공지능(AI)이 있는 시대예요.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대충만 설명해도 AI는 수많은 멋진 표현을 알려주죠. 이제 단어를 찾는 일은 너무 쉬워졌어요.
예전에는 내 마음을 말하기 쑥스럽거나 겁이 날 때가 많았지만, 이제는 AI에게 내 마음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어요. 심지어 AI는 내가 내 고집만 피울 때 냉정하게 나를 가르쳐 주는 대화 상대가 되기도 하죠.
AI는 문장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라는 마음까지 대신 만들어 주지는 못해요. 이제 도구는 준비됐어요. 중요한 건 우리의 질문이에요.
저는 학교에서 배우는 철학이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꼭 필요하죠. 다만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내 삶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태도예요.
어휘력이 줄어드는 건 단순히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에요. 내 마음을 선명하게 보지 못하고, 결국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신호예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어 시험이 아니라 다시 묻는 습관이에요.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지?" "상대방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내 진심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사라졌던 언어는 다시 돌아와요. 언어는 결국, 누군가에게 내 마음이 닿고 싶을 때 다시 자라나기 때문이에요.
사실 요즘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과 아주 빠르게 연결돼요. SNS에서 수많은 사람과 대화하려면 길고 복잡한 말보다 "대박", "킹받네"처럼 짧고 강한 말이 훨씬 편하고 빠르죠. 그래서 어휘력이 줄어든 건 어쩌면 빠른 세상에 적응한 결과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어요. 이런 '빠른 말투'가 가족이나 친한 친구처럼 깊은 대화가 필요한 관계까지 다 차지해 버리는 거예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과의 관계예요. 내 마음이 지금 왜 아픈지, 왜 기쁜지를 정확하게 아는 데 단어는 아주 소중한 도구가 돼요. 어휘력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나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