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고통, 그리고 책임에 대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David Benatar)는 그의 책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Better Never to Have Been)』에서 매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존재일까.
베나타의 주장은 단순한 비관주의가 아니다. 그는 감정이 아니라 논리를 통해 출생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의 핵심 논리는 고통과 즐거움의 비대칭성에 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질병과 상실, 실패와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반면 태어나지 않는다면 고통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즐거움 또한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을 아쉬워할 존재 역시 없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분명하다.
출생은 동의 없이 누군가를 위험 속으로 들여보내는 행위이며, 가능하다면 삶을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고통이 예정되어 있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그 선택을 대신 내려도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쉽게 답하지 못한다. 출산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의 결정 역시 나는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한다.
내가 보기에는 고통과 즐거움은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고통을 제거해야 할 피해로 이해하지만, 삶 속에서 경험하는 많은 기쁨은 오히려 고통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실패를 극복하며 얻는 성취감, 관계의 상실 이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랑, 무너졌던 삶을 다시 세우는 순간의 평온함은 고통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감정들이다.
마치 위가 있어야 아래가 있고, 안이 있어야 밖이 존재하듯
나에게 고통과 즐거움은 서로 반대편에 놓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 안에 존재하는 이원성에 가깝다.
그래서 출생을 단순히 고통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행위로만 보기는 어렵다.
나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운명을 대신 판단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존재하지 않는 이의 삶이 가치 있는지 없는지를 미리 결정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삶의 가치는 태어나기 전에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형성되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이 예정된 출산, 예를 들어 무뇌증과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나 역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다만 그 판단 역시 제3자가 단정할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감당해야 할 선택의 영역에 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나에게 선물한 사유는 이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들은 선택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부모의 책임이란 아이에게 행복만 보여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처음 삶의 무게를 마주할 때 잠시 기대 설 수 있는 지지대가 되어 주는 일에 가깝다.
극복은 결국 아이가 한다. 삶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가 전쟁 상태이든 빈곤하든 그것이 출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임을 감당할 결심이 있다면 선택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포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선택 이후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선택의 위치에 강제로 놓이게된다. 출산을 선택하든 출산하지 않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된다.
출산하지 않는 선택에는 하나의 포기가 따른다. 아이가 성장하며 주는 기쁨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경험을 내려놓는 일이다. 반대로 출산을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책임이 따른다. 자신의 선택으로 시작된 존재가 삶을 견뎌낼 수 있도록 끝까지 곁에 서는 일이다.
사회가 지지대가 되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전쟁과 빈곤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저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예측 실패에 대한 책임은 부모가 아이의 원망을 평생 몸으로 받아내는 것으로 지는 것이다.
출생은 낭만이 아니다.
내 선택으로 시작된 존재의 비명까지 감당하겠다는 처절한 약속이어야 한다.
어느 선택이 더 도덕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삶이 시작될 가치가 있다고 믿는 쪽에 조금 더 가까이 서 있다.
삶은 안전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감수하면서도 함께 살아볼 만하다고 여겨질 때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