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두 분은 아직 잠들어 있다. 엄마를 깨우기 시작하자 졸린 눈을 비비며 눈을 뜬다. 잠을 잘 잤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말소리를 듣고 깨어난 아빠도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가는 소리들, 조금 전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꿈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얼마 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는 내게 꿈은 잠들어있을 때 생생하게 남는 것이라고 그랬다. 깨어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라면서.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직전까지 생생하던 것들이 눈을 뜨는 순간 잊혀 버린다는 게. 그렇다고 아쉬움이 드는 건 아니었다. 어렴풋 기억나는 것들의 대부분은 예쁜 구름과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드 넓은 들판이었다. 초록의 잎들로 물든 그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구름의 모양을 바라봤다. 그리고 들판의 한가운데에는 초록색잎으로 물든 은행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엔 늘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꿈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게 되더라도 무섭지 않았다. 나아가기만 하면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시청했다. 아빠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깎았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부침개를 만드는 영상을 보고 두 분은 말은 맞춘 듯 비가 오니 점심에는 부침개를 만들어 먹으면 좋겠다고 대화를 나눴다. 미나리를 넣자고 했다. 그리고 새우도 넣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엄마는 곧장 친구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을 같이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통화를 끊고 나자 엄마는 아빠에게 더 많이 준비해야겠어라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아빠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져 갔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더니 네 아빠는 시간이 촉박해지면 말도 없이 저렇게 손이 빨라 진단말이야. 엄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문의 벨이 울렸다. 엄마와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친구가족이 나타났다. 손에는 노란 튤립이 들려 있다. 엄마는 무엇이냐고 물었고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뭘 사 올까 하다 꽃집에서 튤립을 팔길래. 우리 노랑이가 생각나서.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정말 예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쓰다듬으며 널 생각해서 사 오셨대. 정말 예쁘지? 너처럼. 친구 역시 나에게 다가와 볼을 맞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요리를 하는 사이 비가 그쳤다.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엄마는 내가 배고프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빠에게 다가가 나를 주겠다며 조금만 달라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아빠는 엄마가 먹고 싶은 게 아니냐고 물으며 웃었다. 엄마는 민망한 듯 웃었고 작은 목소리로 아이도 나도 둘 다야. 아빠는 작게 잘라 식힌 부침개를 우리의 입에 넣어주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입모양으로 최고라고 말했고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빠가 다된 것 같다고 말하자 엄마는 할머니에게 전수받은 비법소스라면서. 간장에 설탕과 매실액을 넣고 양파와 고추를 작게 썰어 부침개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소스를 뚝딱 만들어냈다. 엄마의 친구는 먹을 때마다 알려달라고 하지만 알려주지 않아서 알 수 없다며 웃어 보였다. 엄마는 나를 쓰다듬으며 나중에 엄마와 함께 요리를 하게 되면 너에겐 할머니의 비법을 알려줄게. 하고 말했다. 내가 엄마의 키만큼 자라면 우리는 함께 요리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능숙하게 잘 해낼 수 있을까. 궁금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친구는 부침개를 먹으며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한편에 누워 잠이 들었다. 대화소리에도 깨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다. 문득, 친구는 무슨 꿈을 꾸는지 알고 싶어졌다. 나와 같이 예쁘고 좋은 꿈을 꾸는지 말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네 꿈은 얼마나 예쁜지 하고. 어른들은 오래전의 일들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알고 있던 이야기였음에도 계속해서 웃기 바빴다. 똑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듣는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생각했다. 점심때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저녁식사 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저녁도 먹고 가지 그렇냐고 묻는 말에 그렇게까지 하면 실례야. 하고 웃으며 하는 말에 더 이상의 권유는 하지 않았다. 잠든 친구를 안고 나가려던 찰나 창밖너머로 가로등의 불빛이 켜졌고 바깥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모두들 그대로 멈춰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엄마는 늦지 않게 함께 보면 좋겠는데라고 말했고 아빠는 예정대로라면 이라고 말했다. 짧은 대화를 끝내고 인사를 한 뒤 뒷정리를 함께 하던 아빠는 엄마에게 고마워. 이런 일상을 누릴 수 있게 해 줘서. 그러자 엄마는 이런 일상이 뭐냐면서 평범하지 않냐고 그랬다.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평범하다고 느끼는 것들일수록 더 지키기 어려운 법이라고. 엄마는 나를 바라보고서 네 아빠가 철들었나 보다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이게 다 네 덕분인 것 같아. 엄마 아빠가 이렇게 살 수 있고 지내고 있는 건. 말을 듣고 내가 두 분을 위해서 했던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 단지 그 마음을 누리고 받고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두 분의 행복의 이유는 나. 그리고 두 분이 살아가는 이유도 나라고 말해준다. 이 마음에 대한 답을 나는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보여주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괜히 겁이 나기도 한다. 먼 훗날 부모님이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엄마아빠라고 답해주고 싶다. 그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려줘야겠다. 들어도 들어도 좋을 만큼. 환하게 웃을 두 분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혼잣말을 하는 사이 졸린 듯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두 분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내 귓가에 들려온다. 서서히 눈이 감긴다. 말소리가 흐릿해져 갈 때쯤 다시 눈을 뜨자 내 눈앞 앞에 펼쳐지는 건 두 분의 모습이 아닌 푸른 들판의 어디쯤이었다. 나는 단번에 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들판을 걷다 보니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주저하지 않고 숲길을 따라 걸어갔다. 조금 걸었을까. 엄마와 함께 산책 중 보았던 고양이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나를 피하지 않고 내가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나를 따라 움직였다. 넌 어디에서 나타난 거니? 하고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같이 갈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고양이도 기분이 좋은 것인지 함께 웃었다. 우리는 이제 친구가 되었다. 무심코 뒤돌아보자 푸른 들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자 고양이는 나를 흘깃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계속 걸어가자며 나를 재촉하는 듯했다. 고양이에게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겁이 나서 그래. 자 봐 걸어온 길이 너무 멀어졌어. 걸어갈 길이 얼마나 남은지 알 수 없는 걸? 그러자 고양이는 내 말이 끝나길 기다리는 듯 걸음을 멈췄다. 고양이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푸른 하늘이 보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새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까치의 울음소리는 내 귓가에 선명히 울려 퍼졌다. 고양이는 새소리를 듣고 나와 같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뭇가지 위에 앉은 까치는 우리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냈다.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내가 나아가려던 방향으로 날아가버렸다. 고양이는 그 모습을 보고 나를 흘깃 바라보더니 까치가 날아간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는 고양이를 놓치게 될까 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뛰었던 적이 있던가. 의문은 앞서가던 고양이와 다시 가까워지자 사라지고 말았다. 까치를 찾기 포기한 것인지 멈춰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고 내 옆으로 와 발걸음을 맞췄다. 나는 고양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아무런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까치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희미하게나마 들려왔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갔지만 숲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나자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냄새의 정체는 만두와 찐빵을 파는 가게였다. 엄마와 함께 사러 갔었던 기억이 난다. 열린 뚜껑 틈새로 김이 피어 나오고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는 성큼 뛰어올라 찜기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나는 놀라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말했지만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재빠르게 찐빵하나를 하나 물어 나에게 던졌다. 다행히 뜨겁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몫을 챙겼다. 다시 앞장서 나아가는 녀석을 뒤에서 찐빵을 조금씩 뜯어먹는 동안 까치가 다시 나타났다. 우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고양이는 까치에게 흥미가 떨어진 것인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궁금함에 물었다. 넌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하지만 고양이가 그랬듯 답이 없었다. 내가 싫은 걸까 하는 생각도 잠시 나 역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끝이 보이겠지 하고 걸어가는 것일 뿐. 어쩌면 두 녀석 모두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끝이 보일 거란 기대를 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걷자 드디어 숲의 끝이 나타났다. 벗어나자 처음 보았던 들판과는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그곳의 한가운데에는 은행나무가 있었다. 엄마가 내게 말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초록색이던 잎들이 샛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정말 예뻐 보였다. 끝에는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감에 힘이 났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고 말하면 놀라지 않을까, 고양이와 까치를 만났고 팥이 잔뜩 들어간 찐빵을 먹었다고 신이 나 말해야지. 있는 힘껏 뛰기도 했던 나를 칭찬해 달라고. 작게만 보이던 나무는 거리가 가까워져 갈수록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큰 나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나란히 걷던 고양이도 모습도 곁에서 날고 있던 까치도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마치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무섭지 않았다고 씩씩하게 잘 올 수 있었다고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은행나무에 기대앉아 주변을 둘러봤지만 엄마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놀라게 하기 위해 숨어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 나는 모르는 척 놀란 척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만약 만나게 되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이대로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혼자 남게 될 텐데 친구들도 엄마 아빠도 없는 곳에서 그럼 큰일인데 걱정이 늘어만 갔다. 나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지 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샛노란 은행잎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 예쁘고 샛노란 것을 찾고 싶어 두리번거렸다. 신중함을 더해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손을 내밀어 하나를 쥐어 잡았다. 그러자 곧장 새하얀 빛이 나를 비추는 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꿈의 기억들이 희미해져 감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났다. 11월 18일 02시 08분. 무사히 태어났다고 건강하다며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 뒤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건 노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