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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30. 2021

집시의 춤

- 플라멩코에 빠지다 -

  지난해 사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햇살은 풍요롭고 따뜻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 반을 달려 세비야에 도착했다. 가로수 하카란다의 보라색 꽃들이 화려한 도시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우린 볼거리가 모여 있는 구시가지 산타크루즈 지구로 향했다. 세비야 대성당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남녀 한 쌍의 댄서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하얀 셔츠에 빨간 스카프, 빨간 바지에 검은 구두를 신은 남자 댄서가 나무판 위에서 현란하게 스텝을 밟고 있었다. 절도 있는 발동작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내 발가락도 덩달아 춤을 췄다. 남자 댄서의 몸짓 하나하나, 달뜬 표정과 눈빛에서 사랑의 환희와 아련한 슬픔이 느껴졌다. 낯선 도시, 낯선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플라멩코는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은 플라멩코 공연 관람이었다. 친구와 난 여행 책자에서 안내한 공연장을 찾아 나섰다. 비슷비슷한 골목을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극장식 레스토랑 공연장인 ‘타블라오 엘 아레날(Tablao El Arenal)’을 찾을 수 있었다. 칠십 유로에 표 두 장을 예매했다. 음료를 마시며 한 시간 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엘 아레날’의 공연은 낮에 거리에서 보았던 공연과는 분위기나 규모가 사뭇 달랐다. 여러 명의 무용수 외에도 기타 연주자, 가수까지 출연자가 다양했다. 공연은 극적이고 화려했다. 댄서들의 몸짓과 발 구름, 손가락 끝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노래와 춤의 흐름을 따라 내 몸과 마음도 고조되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플라멩코는 불꽃을 뜻하는 ‘flam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플라멩코는 자신의 몸을 불쏘시개 삼아 영혼까지 훨훨 태우고 사그라지는 불꽃을 닮았다. 플라멩코 공연에는 ‘두엔데(duende)’라는 순간이 있다. 영혼의 폭발을 체험하는 순간이라고 한다. ‘엘 아레날’ 공연에서 ‘두엔데’의 순간을 느꼈다. 나이 든 가수의 거칠고 쉰 목소리가 깊은 슬픔과 고통을 토해낼 때, 무용수의 격렬한 발동작과 몸짓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였다. 플라멩코 음악의 가사는 집시들의 고난과 박해, 운명의 잔인함, 사랑의 고통을 담고 있다고 한다. 공연장에서 보았던 플라멩코가 애절한 곡조와 울부짖음, 영혼을 불러내는 춤으로 집시의 설움과 비탄의 정서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면, 거리에서 보았던 플라멩코는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기쁨을 표현했던 것 같다. 아직도 세비야 거리에서 만났던 플라멩코 댄서의 아련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플라멩코를 만나기 전 집시에 대한 나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편협했다. 사라사테의 바이올린 연주곡 ‘지고이네르바이젠’, 오페라 ‘카르멘’에서 집시 여인 카르멘이 부르던 ‘하바네라’, 유럽 여행 갈 때마다 들었던 집시들의 소매치기 이야기가 전부였다. 플라멩코 매력에 빠진 뒤 알게 된 집시의 삶은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르는 아픔을 느끼게 했다. 집시(Gypsy)의 어원은 이집트인을 뜻하는 이집션(Egyptian)에서 왔다. 인도 북서부 지방에서 흘러와 이집트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플라멩코는 가는 곳마다 천대와 박해를 받으며 불가촉천민의 삶을 살아야 했던 집시들 삶의 애환과 고통을 풀어내는 한풀이 굿판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시의 오랜 유랑생활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유전자 속에 심어준 것 같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쫓게 하는 그들만의 유산을. 오페라 ‘카르멘’에서 카르멘은 돈 호세를 유혹하며 ‘하바네라-사랑은 길들지 않는 새’를 부른다. “사랑은 들에 사는 새처럼 자유로워,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 “사랑은 집시처럼 자유로워, 피하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달아나.”라고. 노랫말에서 집시의 삶과 사랑의 방식이 전해진다. 늘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행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욕망, 이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 대한 열망은 유랑생활을 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우리의 뼛속 깊은 곳에는 유목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흔적 중 하나가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게 하는 여행이다. 유목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욕망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것들을 향해 기꺼이 첫걸음을 내딛게 한다. 세비야에서 만난 플라멩코는 언제든 오래전 내 몸에 새겨진 유목의 세포를 깨울 것이다. 그때마다 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에서 무언가에 사로잡혀 벅차오르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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