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은 꽃밭 정리하는 달
십일월은 꽃밭 갈무리를 하는 달이다. 십일월 중순이 지나자 기온이 쑥 내려갔다. 한로에서 상강 즈음 내리던 첫서리가 올핸 입동을 지나서야 내렸다. 기후 온난화가 절기마저 바꾸었다. 서리가 내리면 가장 먼저 빛깔이 변하고 주저앉는 꽃은 달리아다.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달리아는 마냥 꿋꿋하다. 언제까지라도 꽃을 피울 듯 꽃봉오리를 내밀다가 단 한 번의 된서리에 잎과 줄기가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줄기가 꺾이며 푹석 주저앉는다. 다른 꽃들이 서서히 빛을 잃고 시들어갈 때, 달리아는 화려하고 찬란했던 날들의 빛깔을 하룻밤 새 잃어버린다.
달리아가 주저앉으면 꽃밭 갈무리를 시작한다. 올핸 작년보다 두 주나 늦었다. 십일월 초까지 가을 날씨가 이어지면서 달리아꽃이 여전히 창창해 뿌리를 캘 수 없었다. 소설을 며칠 앞두고 텃밭 정리를 시작한다. 여름 내내 꽃밭을 환하게 밝혀준 꽃들의 줄기를 뽑아낸다. 맨드라미 줄기는 너무 굵어서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줄기를 당기다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몇 번이나 찧었다. 분꽃의 뿌리는 내 팔뚝만큼이나 굵다. 그렇게 곱고 여린 꽃잎을 가진 꽃의 뿌리가 하도 크고 굵어서 깜짝 놀란다. 분꽃은 그 뿌리의 힘으로 여름부터 가을까지 쉼 없이 꽃을 피워냈나 보다.
꽃밭을 오래도록 환히 밝혀준 백일홍과 천일홍 줄기도 걷어낸다. 백일홍은 자라는 동안 몇 번이나 잘라주었는데도 일 미터가 훌쩍 넘는다. 잎은 병들고 시들어 바스러지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꽃을 피운다. 늦가을까지 꽃밭을 환하게 해주는 고마운 꽃이다. 무더기무더기, 하얗게 바랜 꽃송이를 매단 천일홍 줄기도 걷어낸다. 백일홍과 천일홍을 걷어낸 자리에선 내년 봄이면 또 푸른 싹이 쏙쏙 올라올 것이다. 제멋대로 뻗어나간 덩굴장미 줄기를 지지대에 묶어 주고, 늘어진 능소화 마른 가지를 잘라준다.
대충 꽃밭 정리가 끝나고, 꽃밭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달리아 뿌리를 캔다. 내년 봄 싹 틔울 뇌두 부분 다칠세라 조심조심 뿌리를 다듬는다. 여름내 고고한 자태로 피고 졌던 글라디올러스 뿌리도 캔다. 둥글납작한 모양새가 납작 복숭아를 닮았다. 흙을 털어내고 말끔히 손질해 가을볕에 수분을 날려 보낸다. 뽀송해진 달리아와 글라디올러스 알뿌리를 신문지에 싸 스티로폼 상자에 보관한다.
지난 유월에 캐서 보관했던 튤립 알뿌리를 심는다. 장마와 무더위에 썩거나 말라비틀어진 뿌리들이 많다. 잘 버텨온 뿌리들을 골라 망에 담아 심는다. 튤립 뿌리는 두더지가 좋아해 그냥 심으면 꽃을 못 볼 수 있다. 상한 뿌리가 많아 새로 주문한 튤립과 처음으로 가꾸게 될 알리움 뿌리도 함께 심는다. 내년 여름엔 꽃밭에서 둥근 공 모양의 보랏빛 알리움 꽃을 볼 수 있겠다. 동글동글 예쁜 꽃의 꽃말이 “무한한 슬픔”이란다. 알리움이란 꽃 이름에서 둥그렇게 뭉쳐진 슬픔이 뚝 떨어질 것 같다.
내년 봄과 여름에 필 꽃씨들도 심는다. 구월에 파종한 양귀비와 수레국화는 벌써 새싹이 수북이 올라왔다. 겨울을 나고 내년 봄 파란 촛대를 밀어 올릴 무스카리, 구월이 오면 감나무 아래서 펄펄 타오를 꽃무릇의 푸른 잎들이 싱싱하다. 내년 봄 정원을 아름답게 수놓을 꽃씨를 심는다. 진분홍 당아욱, 연보라 락스퍼, 분홍 에키네시아, 하양 아미초, 선홍 빛깔의 로빈슨 데이지, 색색의 디기탈리스 씨앗을 심는다. 봄이 오면 다채로운 빛깔의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날 것이다. 겨울을 나지 못하는 일일초와 꺾꽂이로 물에 담가 뿌리를 내린 루엘리아는 화분에 옮겨 심는다.
십일월 하순 눈 내리기 전 꽃밭엔 아직도 꽃을 매단 꽃들이 있다. 땅바닥에 납작 자리를 펴고 앉은 루드베키아가 짧은 꽃대를 올려 노란 꽃을 피웠다. 장미 아치의 지붕에는 빨간 사계 장미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담장 아래 샛노란 소국은 한참은 더 버틸 수 있을 만큼 싱싱하다. 꽃밭 울타리 남천 나무 붉은 열매가 가을꽃을 대신해 영롱하게 빛난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꽃밭을 지키고 있을 꽃들이다.
2024. 11. 21. 나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