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의 부들거림, 웅크림의 어룽짐, 잃어버린 시간의 핥음, 수그림의 축, 어두움의 헝클어짐, 고통의 펄떡임. 그 모든 것의 가림막. 그러니까 글 뒤에 숨지 않겠단 말은 까발림이 아닌 싸안음의 깃발이자 청원. 간곡한.
지금은 출처를 알 길 없는 별명, 사랑교 교주.
그 교주가 실은 세상 겁쟁이라 짝사랑 전문이라면 믿으실는지요. 낯가림과 게으름의 악수, 서툰 사랑짓.
사랑교 교주. 어쩌면 그 별명은 사랑이 철철 흘러넘치고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이들을 남몰래 힐끗거리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바람은 아니었을까. 자꾸자꾸 말하다 보면, 자석처럼 철커덕철커덕 사랑이 달라붙으라는 엉큼하고 시커먼 속내.
언젠가 대학 선배한테 한 말. 선배, 난 비극에 강한 거 같어. 웃음이 많아서 그래. 그래? 피에로는 항상 웃잖아. 그래서 비극이지. ….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았어요. 어떻게 해도 잘 풀리지 않을 줄. 그냥 알겠더라고요. 딱.
"바로 이것이로구나, 너절함아, 내 곁에 자리 잡으려무나, 무너짐아, 그래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떠나야 할 세계도, 도달해야 할 세계도 문제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세상들이, 사람들이, 말이, 불행이, 그러니까 불행이 다 끝나버릴 수 있도록."(사뮈엘 베케트,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 중에서)
그걸 알면서… 다 아는데두 욕심이 났어요. 염치도 없이,
동선 작가님이랑 꿍꿍이가 시작된 2022년 7월 30일에 쓴 글
아픔을, 그 겪음을 모르는 이들의 갸웃함. 아픔과 새로운 일의 상관관계, 그 쭈뼛거림. 어떤 일이든 하다 보면 중간에 어그러지고 틀어질 변수는 많아요. 꼭 아픔이 아니라도. 그걸 모르지 않았어요. 머리로 아는 거랑 내 일이 되는 건 달라요. 다른 얘기더라구요. 만약 당신이 양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보이며 저랑 똑같은 고민을 했더라면, 슬그머니 손 내밀어 머뭇대는 당신 손을 잡았을 거예요. 왜 그런 말을 해? 같이 하자. 엉?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눈꺼풀이 깜빡일까 부릅뜨고서. 그러니까 내 손이 내민 손이냐, 잡힌 손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주름 그늘. 일부러 숨긴 적 없고 아무도 뭐라지 않아도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뭔 일이 터지면 이럴 줄 뻔히 알믄서 덤빈 꼴이 될까 갑갑한 게. 아프지 않으면? 모르고 당한 일이니 휴우, 한숨 한 번에 휘발될 시름. 그건 뭐랄까…앞통수랑 뒤통수 차이랄까. 그런 적 있나요? 밥을 먹다가내 얘기에 일제히 땅바닥을 향해 수그린 정수릴 본 적. 깔깔 대다가 내 말 한 마디에 얼음땡 공기, 돋은 소름을 쓸어내린 적. 허연 냉기에 서늘해진 이마를 괜히 짚은 적. 똑 떨어지게 설명할 순 없지만, 있어선 안 될 자리에 분수도 모르고 껌딱지 붙은 궁둥짝을 들이미고 어거지로 낑겨 앉은…. 어디서도 가시지 않던 찜찜함. 그때 그 텁텁함.
그 여름, 저는, 저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어요. 그럴 힘이. … 거짓말. 맞아요. 거짓부렁이예요. 그러기 싫었어요. 모른 척 냅두고 싶었어요. 가… 어서 가. 평생 도망만 다닌 제가 어디까지 달려가는지 보고 싶었어요. 한 번도 가닿은 적 없는, 어딘지는 몰라도, 거기 있는… 저를. 딱 한 번만이라도.
아픈 거랑 염치가 뭔 상관이냐. 관계가 소유물도 아닌데.
동선 작가님이랑 2년 넘게 수다를 떨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곰곰 생각해 봤어요. 퍽 맘에 들었던8천 킬로미터라는 물리적 거리랑 16시간 시차. 맞장구였던 끌림에 화력 더한 닮은꼴 승질머리. 잠시잠깐의 곁눈질도 아까와하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쓰면서 알았어요. 동선 작가님도 저만큼이나 미친 자기애 족속이란 걸. (책을 읽은 분들은 아실거예요. 상대 말에 맞장구 치기엔 자기 말하기에도 바쁜 말 많은 공산당에 나르시시트라는 걸.) 혼자 있는 걸 겁내긴커녕 주기적으로 '그래야 하고', '그래야만' 숨 쉬고 살 수 있는 희귀종. 어느 선을 넘어가면, 사랑조차 걸리적거리고 부대껴 내빼고달아난 저처럼. 아이 낳고 덮친 젤 커다란 무서움은 24시간 365일 '함께 있음'.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거랑 무관하게 숨통을 조여오던 그때 그 공포.
이 나이에 이런 얘기 좀 뭣하지만, 사랑…… 그거 잘 모르겠어요. 사랑은 마음이라던 굳은 믿음. 몸이 모든 걸 통제한다는 걸 알고 나서 금 간 그 단단한 믿음. 마음은 어딨을까. … 통증처럼 몸에서 일어나는 마음. … 몸에서 발화하는 사랑. 저릿한 손끝, 붉어지는 뺨, 빨라지는 맥박, 통제 불능의 달뜸. 지금까지 내가 한 사랑, 머리로 한 그건 다 쭉정이. (…) 몸에 깃든 마음. 몸에서 발화하는 사랑.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에서)
몸에서 일어난 사랑은 한 번. 여지껏 달랑 한 번. 만지고 싶어…. 닿자마자 확 쏠린 물방울 둘. 그때 그 물빛. '하나가 다른 하나를 오려내어 만든 듯.'* 저는 또, 썼어요. 다시 산다면, 살아도 죽은 삶이 아닌 죽어도 산 삶. 매일 아침 신생아로 눈 뜨고 매일 밤 시체로 눈 감는, 싹 다 태운 텅 빔. 죽을 때까지 연애. 나무랑 꽃이랑 햇살이랑 바람이랑 구름이랑 비랑 달이랑… 살아 숨 쉬는 그 모든 것과.… 그리 살래요.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에서) 사랑맛도 모르면서 '그저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파 그럴 대상을 향해'(달빛요정역전마루홈런의 노래 '나를 연애하게 하라' 변주) 담쟁이처럼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끈덕진 생명력, 내 사랑 촉수.
치근대지 않고, 담백하게, 저 멀리서.
사노 요코가 책 <죽는 게 뭐라고>에 쓴 첫 문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이다. 어쩜, 나도. 사노 요코, 그녀처럼 제 단골 짝사랑 상대는 맨 죽은 사람 아니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볼 일 없는 이들. 그런 제 마음 우체통엔 허구한 날 써댄 속엣말 편지가 수북. 블로그랑 메일함엔 주인한테 당도하지 못한 철 지난 마음 뭉치… 편지 무덤, 무덤들. 저걸 다 어째야 하나. 죄 불 싸지르고 떠나야 하나. 아니면, 싹 파헤쳐 이제라도 제 주인한테 보내야 하나. 오래전 금지당한 마음 자락이라 수취거부. 아니면, 수취인 불명.
알라딘 포장지
동선 작가님이랑 반환점을 기념하며 본 영화 <84번가의 연인들>. 미국 무명작가 헬렌 한프와 영국 고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이 20여 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쌓은 우정 이야기. 죽을 때까지 얼굴 한 번 마주한 적도, 한 공간에 있어본 적도 없는 두 사람, 헬렌과 프랭크. 작가였던 헬렌 한프는 프랭크와의 이야길 써서 <채링크로스 84번지>라는 책으로 내고, 그 책은 영화 <84번가의 연인들>로 만들어져요. 헬렌 한프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엔 프랭크가 일한 고서점을 배경으로 책 <채링크로스 84번지>와 편지를 소재로 탕웨이 주연의 영화 <북 오브 러브>가 만들어지기도. 중고 서점으로 출발한 '알라딘'에선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면 겉포장지에 헬렌 한프가 프랭크한테 보낸 편지 속 글귀가.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중에서.)
관계라는 건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 '팬심'정도에서 합의하고 스스로 성장하고 익어갈 수 있는 순간을 즐기자는 동선 작가님. 팬심과 합의라…. 글쎄요. 저는 썼어요. 폭로가 천성인 비밀. 불이행이 본성인 약속.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뭐를. 이따위 인생에. 시작도 끝도 머리도 꼬리도 진실도 거짓도 낮과 밤도 빛과 그림자도 기쁨과 슬픔도 하늘과 땅도 삶과 죽음도. 모두 같은 말, 한 통속.
'살아있음은 차이, 변화, 그리고 흐름. 사람도, 물질도, 마음도, 인연도, 생각도, 윤리도, 정의도, 시간도, 세상도. 그리고 문학이랑 예술도. 멈춤과 고임, 그리고 박제는 죽음의 초상.'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중에서)
… 매번 다르고도 같은 사랑빛. 매번 다르고도 같을 있음과 있지 아니함. 어제가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였는데, 알고 있었나요? 계절 사이로 가느다랗게 금이 가고 그 사이로 어제랑 다른 바람이 불어올… 가을로 들어섦, 입추(立秋), 지난 계절이랑 다르고도 같은.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이랑 다르고도 같을.
흐름도 온도도 달라진 바람에 지난날을 돌아본 오늘 새벽녘. 2017년 여름, 암 발병. 그 가을 표준치료 시작. 이듬해 봄 수술. 그 여름, 매일 밤마다 방사선 치료 받으러 올림픽 도로를 달리면서 본 여름 밤하늘이랑 한강 다리 밑으로 흐느끼듯 흐르던 강물, 열어놓은 차창으로 들어오던 밤 공기. 치료 끝나자마자 간 여름휴가. 그예 까진 피부, 처음 맛본 쓰라림. 찍소리 한 번, 찡그림 한 번 없이 꼼짝 않고 수영장 옆에 앉아 있는데… 엄만 왜 안 들어와? …. 문득 든 허기에 여기저기 쫓아다닌 2019년 여름. 이제 막 재밌어지려던 2020년 유월 재발. 그 여름 수술, 세포 하나하나에 박힌 약 냄새. 그 이듬해 여름마다 불어온 황홀한 회오리에 휘청휘청.
그렇게 들어선 사람들 속에서 발견한 '나로 들끓는' 나.
고통과 한 몸인 환희.
확진받고 우리나라에서 두번 째로 유명하다는 의사한테 수술받겠다고 찾아간 대형병원. 드디어 진료실에서 만난 의사가 검사 기록을 꼼꼼히 보더니 처음으로 건넨 말. 왜 왔어요? …? 그 말은 수술해봤자… 라는. 지금도 또렷한 그때 그 의사 눈빛. 선언과도 같던. 너, 곰방 죽어. 그게 2017년 여름. … 곧 끝장날 줄 알았는데 일곱 번이나 더 만난 다르고도 같은 여름 낯. 뜨겁고도 물기 어린. 그러므로 오늘도 좋은 날.
푸른 새벽빛 닮은 백련.
<잃을 일 없는, 당신>
온종일 하늘을 봤습니다. 그리고 온종일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40년 동안 남편도 연인도 아닌, 가깝고도 먼 나라에 사는 한 남자에게(최정호) 편지를 쓴 당신을. 그 마음을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는데, 내심 부러웠습니다. 편지를 쓴 당신도, 당신 편지에 기꺼이 답장을 쓰며 관계를 이어간 그도. 우정이었나요? 어느 한구석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움이었나요? 아니면, 지성이나 감성의 공유였나요? 당신 편지를 받은 그 남자는 당신 편지를 두고 그건 편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혹시 알고 있었나요? 그가 말하길 그건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라 답장을 바라지 않은, 편지 모양을 빙자한 에세이라면서 그저 자신은 훗날 수많은 책을 써낼 당신 필력을 위한 연습용 샌드백이었을 뿐이라고. 하긴 썼다 하면 2000자에서 4000자를 가볍게 넘겼다 하니, 꼭 그걸 의도하진 않았어도 저절로 필력이 늘었을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이참에? 당신은 어느 편지엔가 열두 살에 죽은 특별한 오빠 얘길 합니다. 당신이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랑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리고 고백을 이어갑니다. 유일하게 오빠를 초월한 존재가 당신이 편지를 보낸 그 남자(최정호)라고. 죽는 순간 그를(최정호) 사랑해서 인생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정도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도 마음을 열었고 오래 만나지 못해도 불만 없었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고요. 타인을 향한 이토록 깨끗한 마음이라니요! 당신의 그 마음을 두고 남녀 간에 우정이 어딨냐고 따지는 게 촌스럽고 경박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40년 동안 당신 편지를 넙죽넙죽 받으며 함께 나이 들어간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복이 그리도 많았답니까?
낯가림이 심한 저는 사람 사귀는 게 더딥니다. 얼핏 금사빠처럼 보여도 좀체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뎌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려는 제 수다와 몸짓을 사교적이고 호의적이라고 곧잘 오해하는데, 실은 제 속은 얼음장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일에 서툴뿐더러 한 대상에 빠지면 거기에만 온 에너지를 집중하느라 다른 이들을 서운하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게 저인 걸요. 제가 짝사랑이나 물리적으로 자주 만날 수 없는 대상을 선호하고 당신처럼 마주칠 일 없는 이를 흠모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헤어질 염려 없이, 맘껏 사랑할 수 있어서. 이제 왜 제가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툰지 아시겠죠? 그건 그렇고, 인연이란 참. 이리 유명한 당신이 어떻게 여태 제 눈에 띄지 않았을까요. 보고도 인지하지 못했으려나요. 그런데 요 며칠 이상하리만치 자주 스친 당신. 제가 읽는 책 속에서. '사노 요코가…'라는 글귀로.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저는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없이 살아왔는데 행복하니 기분이 좀 묘합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행복을 얻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행복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세요'
다는 몰라도 어떤 부분은 놀랍도록 저랑 닮은 당신. 할머니가 된 자신을 상상하며 재밌어하는, 부자가 되는 걸 부끄럽다 한, 마을 광장에 온 세대, 아기부터 노인까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행복보단 불편과 약간의 불행에 더 끌리는, 외설스럽고 불경스럽고 능청맞은, 금기를 무시하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유달리 외로움을 타는. 그리고… 유방암에 걸리고도 멈추지 않던 쓰기.
저는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을 정말 아낍니다. 속도를 온몸으로 느끼며 핸들에 손을 올리고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리는 상상에 빠지는 그 시간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달리다 집으로 돌아오는 그 아침, 편지를 씁니다, 당신처럼. 당신과 다르고도 같은, 속엣말 편지를, 지난봄부터 썼으니 어지간히 날아간 줄 알았는데, 되려 불어난 모양새인 어떤 마음. 오늘은 노래를 듣다 울컥했습니다. 왜 그런 노래가 있지 않나요? 어느 한 시절이나 어떤 사람, 어느 한 장면을 고대로 베낀, 온전히 한 시절, 한 사람, 한 장면이 된 노래. 리듬과 멜로디, 가사에 박제된 시절과 사람, 장면. 이런 날은 흔하고도 흔해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잽싸게 눈가를 쓱쓱 문지르거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고 핸들에 손을 올리고 달리면 그만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파랗던 하늘에 정오 무렵 먹구름이 몰려왔습니다. 솨아 빗줄기가 몰아치더니 뚝, 갠 하늘. 저녁 무렵엔 베란다에 서서 붉은 서쪽 하늘이랑 파란빛이랑 분홍빛이 섞인 동남쪽 하늘을 번갈아봤습니다. 정말이지 오늘 하루 변화무쌍한 하늘이었습니다. 당신과 제 삶처럼. 사람 사는 일도 저 하늘 같으면. 왁 몰려와 비를 뿌리고 쌩 돌아서 아무 일 없다는 듯 금세 개면.
아프고 나선 새로운 인연이 생길 때마다 갈등합니다. 이래도 되나. 당신은 어떻게 했을까요. 남에게 피해 주면 안 된다는 강박이 강한 저는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 했더랬습니다. 혹여라도 저로 인해 누군가 아파하면 어쩌나, 겁먹고 무서워.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런 걱정을 하나… 제 꼴이 우스운 날이면 펴지는 어깨. 그러다가도 툭, 까닭 없이 꺾이는 무릎. 그런데 당신 편지에서 절대로 당신(최정호)을 잃지 않을 거라고, 왜냐면 처음부터 잃어버린 사람이라… 그 문장에 고만 왈칵. 그러니까 당신은 그가(최정호) 처음부터 잃어버린 사람이라 편지를 쓴 겁니다. 이미 잃었으니, 절대 잃을 일 없을 거라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40여 년이나 맘 놓고 흘려보냈을 당신 그 마음 물결이 저기, 보이는 듯. 넘실넘실. 아, 이런 겁쟁이. 그런 당신을 저 또한 잃을 일 없어 맘이 놓입니다. 이미 잃어, 절대 잃을 일 없는 당신이라. 그런 당신에게 오래오래 편지 쓰렵니다. 쓰겠습니다. 당신만 들을 수 있는 귓속말…. 겁쟁이라 먼 데로 달아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침, 당신한테 띄우는 속엣말 편지를.
(2022년 9월 23일. 사노 요코랑 베를린 유학 중에 만난 최정호 작가가 그녀게게 40년간 받은 편지를 엮어 낸 <친애하는 미스터 최>를 읽고 블로그에 쓴 글.)
'또다시 두려워지다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하는데 너는 그렇지 않아서
사랑받는데 네 사랑은 아니어서
그런 척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런 척할 수는.'
(사뮈엘 베케트)
저 먼 데서 몰려왔다 물러가는 파도를, 바라보고 선, 깜빡임 없는 눈동자.
이 여름, 다르고도 같은, 사랑의 되밀림.*
'잘 있어요. 끼니 거르지 마시고 영양도 챙기시고, 그다음은 마음대로 하세요.'
(사노 요코, <친애하는 미스터 최> 중에서)
잃을 일 없을, 여기, 당신, 당신들.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여름이.
더 높이, 더 먼 데로 날아가고파 정든 이들한테 등을 보이고 둥지를 떠나는 검은 새. 절정이자 스러짐인 이 여름 끝자락, 어제랑 달라진 바람처럼 다르고도 같은 내 마음 물결….
동선 작가님이랑 제 사이요?
잃을 일 없고, 그랬으면 좋겠는… 씀벗.
여기, 당신, 당신들이랑 다르고도 같은.
덧
글 제목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 '나를 연애하게 하라'에서 인용했어요. 그림은 '가제- 그의 영화 나의 댓글’을 바탕으로 한 ‘초기구상’이고요. (말씀하신 대로 적었어요, 동선 작가님.)'*'는 나탈리 레제의 <말 없는 삶>에서 인용하고 변주한 글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