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 학교 앞 파전집에서 파전이랑 동동주 시켜놓구 두목이 그랬잖아. 난 소주는 안 먹어. 대학 때 그렇게 먹구 이제와서? 미국 유학 갔을 때도 언니가 팩 소주 보내지 않았나? 그랬지. 근데, 갑자기? 소주는 독이야, 독. 독을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히 살아있네? 기적이지. 흐흐흐. 너 간장은 뭐 먹냐? 간장? 음… 몰라. 너, 주부 맞냐? 나, 주부 아냐. 살림 때려쳤어. 간장은 말이야 어쩌구저쩌구. 고추장은 솰라솰라. 그리고 된장은 있잖아……. 너, 기름은 뭐 먹어? 기름? 들기름 참기름, 이런 거? 아니, 그런 거 말고. 식용유 말이야. 포도씨유? 얘가, 얘가, 큰일날 애네. 이제부터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먹어. 왜애? 이러쿵저러쿵. 알았지? 앞으론 그거 먹어. 흐흐흐. 내가 두목한테 요리 강의 들을 줄이야. 딴소리 말고 이제부터 그거만 먹어. 알았어? 엉. 너무 많아서 헷갈려. 톡으로 보내. 외워, 외워. 그러지 말구 두목이 만들어주면 안 돼? 그래서 말인데, 내가 어쩌구저쩌구. 흐흐흐. 못살아, 증말!
두목.
지난 주에 30여 년만에 만난 C 선배 말이야. 두목이랑 둘도 없는 친구 맞더라. 음식은 가리지 않고 땡기는 대로 먹는다니까 그담부터 어찌나 잔소릴 하던지. 유제품은 절대 먹지 마라, 고기도 안 된다, 특히 육회는. 생선은 구이도 원래 안 된다, 탕으로 팔팔 끓여 먹어야 한다. 그리고 영화 <파묘> 봤다니까 눈을 치뜨더니 대뜸 그러대. 넌 그런 영화 보면 안 돼. 엥? 이유는 안 물어봤어. 또, 잔소리할까 봐.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 먹고 자고 싸는 거보다 중요한 게 뭐 있겠나. 꽃이 좋고, 풀떼기가 좋고, 비가 좋고, 노을이 좋고, 구름이 좋고, 달이 좋고, 바람이 제아무리 좋아도. 글에 미쳐 날뛰고 사랑 없인 죽고 못 살아도 C 선배 말처럼, 숨부터 쉬어야. 숨이 안 쉬어지면, 그게 힘들면 놓는 게 맞지. 연아, 놔. 놔버려. 그냥 다 놔버리라구. 있잖아, 두목. 작년 여름 두목 만났을 때만큼, 나 정말 놀랬잖어. 30여 년을 훌쩍 건너온 C 선배가 날 척 보더니 놔, 놔버려. 그 말을… 자꾸 자꾸만 해서. 내가 꼬옥 움켜쥐고 있단 걸, 그런 내 꼬라지가 다 보였나 봐. 그렇게 오래 떨어졌다 만났는데, 그랬는데도 선밴 한 눈에 알았나 봐. 나, 다 들켜버렸나 봐. 연아, 놔. 그냥, 다 놔버려. 아직도 귀에, 마음에, 그 말이, 쟁쟁거려.
두목.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이라는 詩, 알어? 황인찬 시인이 지은. 내가 좋아라하는 진은영 시인은 '백자'가 자꾸 '백지'로 읽힌다나. '이 희고 둥글고 빛나는 사물을 왜 나는 잘못 부르'냐면서 '백지가 무언가 가득 담을 수 있는 백자와 같았으면 하는 마음', 혹 그래서 그런가… 하대. 근데 말이야, 두목. 난 이 시를 읽는데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는' 백자가 '흰 얼굴'로 읽히는 거야. 읽고 읽고 또 읽어도 방금 세수하구 멀끔헌 얼굴로 들어와 방 한복판에 선 단 하나의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