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 '니 인생 살어' 2
'"니 인생 살어."
한 고집하는 아부지는 내내 그 소리만.
"니 인생 살어."
나를 오래전 그때 그 저녁으로 데려다 놓는 아부지 그 잔소리. 시위대를 피해 버스 타고 집에 와 현관문 열다 아부지랑 눈 마주쳤던 그날 저녁. 나도 몰랐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영 찜찜하던 그 저녁. 아부진 다 알았구나. 다 알고 있었어.
(…)
잉걸불. 장작불이 핏빛이 되도록 타는 그 순간의 불.
얼마 전, 40년 지기가 한 말. 요즘 널 보면 잉걸불같어. 핏빛이 되도록 타는 그 순간.
저는 이제야 제 인생 살아볼 참이에요. 사그라들었던 불씨 살려내어. 속깨나 썩인 막내딸이 이제라도 당신 말 듣는 줄 알면 울 아부지 참말 좋아할 텐데.
이제야 말 들어서 미안해, 아부지.'
- '니 인생 살어' (이연) 꼭지 중 /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동선·이연 함께 지음)
토 한 번 달지 않고 믿고 따르던 주치의가 미국으로 훌쩍 떠난 지난봄부터 이 가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내어놓을 대답이 마땅치 않다. 온 천지에 물기 촉촉하던 그 봄날, 밤이고 낮이고 신경 거슬리는 버석거림에 먼지 풀썩이며 타들어 갔으므로. 손바닥은 버짐처럼 허옇게 일어나고 발바닥, 발뒤꿈치는 쩍쩍, 갈라지더니 달그닥달그닥, 바스락바스락 갈피를 못 잡고 부산하던 마음은 짜글짜글 쪼그라들며 푸시식, 둥둥, 훌훌, 날.아.갔.다…. 내가 있었고, 있을, 어디쯤으로.
주치의가 사라진 자리에 목마름이 차올랐을까. 그래서 그렇게나 물을 향해 내달렸나.
글쎄다. 몸이 하자는 대로 움직였을 뿐,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가진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지나온 몇 계절이 그렇고 떠나와놓고는 한사코 '두고 왔다'며 여적지 꼬랑지를 담그고 있는 어떤 시절이 그렇고 지금 여기 알쏭달쏭한 눈빛이 그렇고 온 더듬이로 감각하는 모든 순간이 그렇다. 이천이십오 년 추석을 이틀 앞둔 오후 네 시 십칠 분, 간간이 들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두어 종(種)의 새소리와 포물선을 그리며 도로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굉음과 빨갛게 달궈졌다 사그라지는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 이따금 들리는 거실 창 저 멀리 회백색 구름이 그라데이션으로 펼쳐지는 이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금 내 안으로 가라앉았다 튕겨 오르며 미묘하게 찌그러지는, 미처 갈리지 않은 물컹한 이 알갱이들은 또 어떻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어려서부터 불길한 징조와 다행인 조짐을 곧잘 감지하곤 했지만 그걸 선명하게 드러낼 만한 언어도, 친근하게 설명할 재간도 없었다.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그 일들이 파생시킨 진동과 파장이 있다. 계절의 향기로 나를 스쳐간 사람과 내 몸속 내밀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된 사람과 선홍빛 피를 뚝뚝, 흘리며 뼈째로 나를 씹어먹은 사람이. 어떤 언어로 그 모든 걸 담아낼 수 있을까. 이 세상과 그 너머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걸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맞춤하게 그려줄 그런 언어가 있기는 할까. 있다 한들, 그걸 자유자재로 부릴 능력치가 내겐 없다.
나는 느.낀.다. 오직 그런다. 매 순간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며, 사르락사르락, 겹을 쌓아 올리듯. 그렇게 쌓아 올린 감각의 더께가 나를 이룬다. 효율성과 실용성, 보편성이라곤 실오라기도 없는 무용한 이방(異邦)의 살덩이. 그게 나고, 그게 다다.
뽀얀 햇살 아래 보랏빛 향기 살랑이며 날 꼬시던 라벤더는 내 몫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을 부렸다. 두 번을 죽이고도 세 번째 라벤더를 사 오던 날은 화분 무게만큼이나 마음이 무겁더니 기어이 또, 죽였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계절 마루즈음이었나. 베란다에 서서 땅바닥으로, 나뭇가지 위로 포슬포슬 내려앉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절 마당 적시는 풍경 소리나 들을까, 하고 집을 나섰다가 거세지는 빗발에 불쑥, 도로 옆 꽃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서 꽃 한 송이 없이 잎만으로도 화사한 아이를 만났다. 이 아이는 이름이 뭐예요? 아, 벤자민이요. 그 아이를 데려와 라벤더가 죽은 화분에 심었다. 모든 삶은 죽음 위에 피어난다니. 자리를 옮기면 제 잎을 떨군다는 그 아이는 다음날부터 한 잎 두 잎, 떼쓰듯 멀쩡한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너도 나처럼 낯을 가리니? 그런 게야? 그날 함께 데려온 아이들은 새끼도 치면서 쑥쑥 잘 자라건만, 그 애만 시름시름, 이슬 같은 잎을 뚝뚝, 떨구며 앙상하게 말라갔다. 아침이면 눈 뜨자마자 그 애한테로 가서 바닥에 떨어진 잎을 주웠다. 이제 고만 나랑 정 붙이고 살자, 어엉? 그러면 안 되겠니? 왜애, 내가 영 싫니? 볕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리저리 옮겨도 보고 물이 부족해서 그런가, 흙을 만져보면서 물을 줬다 말았다… 저는 저대로 내 품이 낯설어서 그런다지만, 나는 나대로 애가 닳고 마음이 쓰였다.
진료를 마치고 올림픽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어, 저기! 여름이 지고 있는 올림픽 도로 방음벽에 능소화가 있었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흐름에 맞춰 주홍빛으로 나부끼는 능소화를 보고 있자니 암이 재발하던 그해 그 유월이 자동소환됐다. 미루고 미루던 집수리를 막 시작한 그 유월엔 한 달 내내 장맛비가 내렸다. 장마도, 재발도, 수술도 느닷없었지만 그때쯤은 인생사 뜻대로 안 된단 걸 알아서 크게 놀라지 않았다.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통에 상심하고 어쩌고 할 새도 없이 고분고분하게 모든 절차를 끝내고 수술 잘하고 돌아와 한숨 돌릴 참이었다. 그때 난데없는 통증이 몰려와 처음으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엄마 아부지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침대맡에서 내 손을 움켜쥔 엄마와 달리 차마 집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아부지의 기척이 현관문 밖에서 들렸다. 옆방 드릴 소리랑 창밖 장맛비 사이로 아부지 슬리퍼 끄는 소리가. 엄마 눈을 피해 몸을 돌려 누웠다. 아, 저 소리…. 그예 터진 울음에 베갯잇이 검게 번져갔다. 그날, 내 가슴을 후벼 파던 그때 그 소리가 여름 끝자락 올림픽 도로 방음벽 위에서, 시들지도 않고, 주홍빛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엄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어. 밖이야."
"밖? 어딘데?"
"어. 오빠랑 언니랑 어딜 좀 왔어. 넌 몸은 좀 어때?"
"어디? 나, 병원 왔다 가는 길인데 엄마랑 점심 먹을라고 전화했지."
"병원에선 뭐래? 엄마, 지금 요양원이야."
"요양원? 무슨 요양원?"
"지금 아부지 요양원 입원시키고 있어."
"아부지를?"
"어. 나중에 통화해."
"어… 알았어."
그 밤, 날이 새도록 소리가 들렸다. 울 아부지 슬리퍼 끄는 소리가….
"엄마, 잘 잤어?"
"어. 나는 잘 잤는데…."
"근데?"
"아부지가, 잠을 못 잤나 봐."
"왜애?"
"밤새 똥을 세 번이나 싸서 오빠가 아침에 와서 여벌옷을 더 가져갔어. 거기서 더 가져 다 달라고 했대."
"아…."
"그리고 옷 갈아입히려고 하면 막 주먹질을 하고…."
"낯설어서, 낯선 사람이라, 그래서, 무서워서, 그러니까, 그런 거야…."
평생 불면증에 시달린 엄마는 어디서든, 바닥에 머리만 닿으면 잠드는 아부질 부러워했다. 그런 아부지가 똥을 세 번이나 싸지르면서 잠을 못 자다니. 얼마나 놀랐으면…. 주먹질은커녕 싸움이 날 폼새면 냉큼 져버리고 자리를 뜨거나 험담도 미움도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아부지가 주먹질이라니. 아부지가 다른 사람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고?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어린 우리 삼 남매를 훈육할 때도 큰소리치는 게 싫어 한방에 모아놓고 기도하던 울 아부지. 꼭 매를 들어야 할 땐 엄마한테 미루고는 쌍꺼풀 진 큰 눈으로 방바닥에 가져다 놓은 회초리를 쳐다만 보던 울 아부지. 자기 이름도, 사는 집도 하얗게… 잃어가면서도 우리만 곁에 있으면 빙글빙글, 웃던 울 아부지. 트로트만 틀어주면 빈 손뼉 치면서 빙글빙글, 잘 웃던 울 아부지. 낯선 데서, 낯선 이들 틈에서, 이름 석 자도 부르지 못하는 답답한 몸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다급함으로 마주 한 새카만 어둠이리라. 길을 잃어버린 줄은 알까. 그마저도 모르는 희디흰 어리둥절함으로 대면한 캄캄함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모른다. 밤이면 지금, 아부지가 맞닥뜨린 그 무서움의 깊이를 가늠하느라 잠이 오질 않는다. 잘 수가 없다. 낯선 방, 낯선 이들 숨소리를 베고 누운 울 아부지가 끌어안고 있을 캄캄함이 훤히 보여서. 아기가 된 울 아부지가 끌어안은 그 막막함과 그 무서움이 어느 구석에서 펑, 터지면 어쩌나.
"아부지, 보고 싶어."
"안 돼. 면회 오지 말래."
"왜애?"
"적응해야 하는데, 자꾸 오면 더 못한다고."
"얼마나?"
"아부지는 다른 사람보다 더 적응을 못한대."
"어…."
미루나무가 생각난다. 나 어릴 적 살던 동네 신작로에 열 맞춰 심겨 있던 미루나무가.
이상한 일이지. 어릴 적 동네 풍경을 떠올릴 적이면 흙먼지 날리던 신작로에 아스라이 서 있던 미루나무가 생각날 정도로 고개를 한껏 꺾어야 끝을 내보이던 시커먼 그 나무가 꼬맹이때부터 참, 좋았다. 신작로에 있던 그 나무가 병원 가는 길, 올림픽 도로 너머에, 있다. 나처럼 미루나무를 좋아하는 누군가 심었나 보다… 병원 갈 때면 강가를 따라 끝도 없이 늘어선 미루나무를 보면서 달린다. 어쩐지 미루나무엔 순박하면서도 믿음직한 구석이 있어 보여서. 울 아부지처럼.
단칸셋방 살 적에 소고기 먹다 말고 이런 거 먹으면 언제 우리 집 살 거냐고 쏘아붙이던 막둥이 말이 목에 걸려 이 악물고 돈 벌어 보란 듯이 막둥이 다니던 국민학교 앞에 집 사서 이사한 울 아부지. 밥때 놓쳐서 혼자 밥 먹을 적이면 물 한 잔 따라와서 옆에 앉아있던 울 아부지. 명절이면 기차역 개찰구부터 달음박질해서 한복대님으로 자리 맡아놓고 객차 칸칸마다 우리 찾으러 다닌 울 아부지. 친구들이 놀러 오면 실없는 농담으로 친구들을 웃게 하던 울 아부지. 밤새 놀다 해가 중천이 되도록 자도 일어나라 한 마디 없이 옥탑방 둘레만 슬리퍼 끌며 돌다 내려가던 울 아부지.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버스에서 내려 어두운 골목길 내려오다 보면 저만치에 보이던 울 아부지 긴 그림자. 학력고사 발표날, 새벽같이 학교로 달려가 공중전화로 합격소식 알려준 울 아부지. 축하한다, 대학생! 약수터 물 뜨러 가는 아부지 따라나선 어둔 새벽길, 두 뺨을 후려치던 겨울 찬 공기와 시커먼 숲내음 뒤로 바짝 따라붙던 울 아부지 허연 입김과 빈 패트병 부딪치는 소리. 연극부 오디션 있던 날 새벽, 택시에서 내렸는데 길 건너 횡단보도에 나와 서 있던 울 아부지. 재밌었어? 엉! 시집이랑 소설나부랭이 읽으며 엄한 짓거리 하러 가는 줄도 모르고 검푸른 새벽마다 그 많은 아침잠 물리치고 도서관에 데려다주던 울 아부지. 결혼한 다음부턴 겉은 멀쩡해 봬도 썩어 문드러지는 속이 보였는지 맨날 나만 보면 니 인생 살라고 잔소리하던 울 아부지. 추석이면 구부정하게 앉아서 입술을 잔뜩 오므리고는 반죽을 치대고 송편을 빚던 울 아부지. 아, 그랬었던그랬었던… 울 아부지.
나는 또 기억한다.
이따금 내 시야에서 사라지던 울 아부지를.
다리밑이나 계곡, 바닷가로 놀러 가던 여름날이면, 한두 시간 사라지던 아부지의 그늘진 시간을. 우리랑 있을 때 아주 잠깐씩 다른 곳에 가 있는 아부지의 빛바랜 동공을.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가던 골목길, 복덕방 문틈 사이로 울 아부지 등허리로 내려앉던 노을빛을. 횡성 산골집에서 우리 먹이겠다고 닭모가지를 비틀어 쥐고 계곡으로 가던 아부지의 비틀거리던 걸음을. 그때 내가 본 건 내 아부지가 아닌, 한 사람, 한 남자가 쌓아 올린 우묵한 시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부지가 짓고 아부지만 드나들 수 있었던 아지트. 내 아부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살고저, 한 남자가 숨 쉬고저 파내려 간 동굴.
"난 누구야?"
멍한 눈빛. 아부지 어딜 보는 거야.
"아부지, 난 누굴까?"
또, 멍한 눈빛. 아부지는 지금 어디 있는 걸까.
"나, 몰라, 아부지?"
"00이."
"00이는 언니잖아. 난 아부지가 젤 좋아하는 이쁜이잖아. 기억 안 나?"
또, 또, 멍한 눈빛. 내가 여기 있는데, 아부지는 누굴 찾아 어딜 헤매이나.
"아부지. 국수역, 기억나? 나랑 둘이서 밤 따러 갔었…"
가만히 날 보는 아부지 빈 동공. 모르는구나. 아부지한테 이제 그날은 없구나. … 없어.
처음 두 번은 이름만 묻다 왔다. 난 누구야? 나, 몰라? 여긴 어디야? 아부지, 이름은 머야? 이름도 몰라? 고작 이름만 묻다 돌아섰는데, 그랬을 뿐인데 울음은 왜 터지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꺼이꺼이 목 놓아 울어버렸다. … 빙신. 세 번째 면회날. 요양보호사랑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아부지가 날 보고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가 싶더니 번쩍, 한 손을 들어 올린다. 아, 좋아.
"아부지! 울 아부지, 오늘은 기분이 좋네?"
맞잡은 내 손을 꽈악 움켜쥐는 아부지.
"와, 울 아부지 힘세다! 아부지. 나, 누구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날 빤히 보는 아부지.
"연이!"
"맞아! 울 아부지, 백점!"
아부지 얼굴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꼬옥, 안고는 휠체어를 밀고 근처 천변으로 갔다. 그날따라 하늘도 맑고 바람도 살랑이고. 아부지, 여기 봐봐. 달개비다. 아부지, 저기, 청둥오리다! 우리 청둥오리 있는 데까지 걸을까? 자꾸 걸어야 다리에 힘도 생기고 그러지. 우와, 저기 오리 좀 봐봐, 봤어, 아부지? 자맥질하는 거, 봤어? 물소리 들린다, 아부지. 그치? 끄덕끄덕. 아부지, 이것 봐. 여기, 호박꽃도 있네. 신기하다, 그치? 끄덕끄덕. 어머, 여뀌도! 아부지 좋아하는 달개비, 여기 많다! 아침이라 나팔꽃이 활짝 폈다, 아부지. 내가 누굴 닮아서 꽃을 좋아하나 했더니, 울 아부지 닮아서 그러네. 그치, 아부지? 끄덕끄덕. 듣기 싫은 말을 하거나 요양원으로 돌아와 이제 고만 간다고 하면 두 눈을 감고는 고갤 숙여버리는 울 아부지. 어쩜… 저 버릇, 아부지한테서 왔구나. 기억을 잃어가는 울 아부지한테 내가 있다. 잎사귀를 다 떨구고 앙상해진 울 아부지한테서 내 뿌리를 본다. 나를 캔다.
'이런 말 미안하지만, 도대체 누구예요?
저는 캐서린이에요.
캐서린, 그렇지. 그래, 맞아. 캐서린이지. (등 뒤의 문을 가리키며) 저 남자는 빌이고.
네.
나는요? 그러면 도대체… 나는 누구죠?
어르신이요? 앤서니잖아요.
앤서니?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앤서니. 이름 좋네. 그렇지 않아요?
멋진 이름이에요.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 같은데. 혹시 알아요?
누구를요?
우리 엄마요. 그분….
아니요.
눈이… 눈이 아주 크셨어. 지금도 얼굴이 선하네. 그녀가 보러 와 주면 좋겠는데, 오실까요?
따님이요.
아니…. (딸이 파리에서 보낸 엽서를 보며) 엄마가… (울음이 터져서) 엄마가 보고 싶어. 여기서 나갈래. 누가 날 좀 데려가 줘요.
진정하세요. 쉬이.
싫어. 엄마 불러줘요. 나 집에 갈래.
왜 그러세요, 앤서니?
(흐느끼느라 말을 못 한다.)
왜 그러세요?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요.
잎사귀요?
네.
무슨 말이에요?
나뭇가지에 바람인지 비인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무슨 일인지 알아요? 집은 어떻게 된 건지. 이제 내 몸 하나 누일 곳이 없네. 그래도 내 시계 하나는 손목에 찼지. 멀리 가야 하니까. 그게 없으면 나는…
(앤서니를 향해 손을 뻗는 캐서린. 그녀의 손을 잡는 앤서니.)'
- 영화 <더 파더> 중
영화 <더 파더>는 치매를 앓는 앤서니와 그의 딸 앤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이 얽히고 기억 속 장면과 사랑했던 사람들이 문 뒤로 감쪽 같이 사라졌다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앤서니의 머릿속은 위태롭다 못해 모든 걸 덧없고 부질없게 만들어버린다. 울 아부지도 그러하리라…. 아마도.
달개비랑 한참 노니는 울 아부지를 보다가 궁금했다.
맨날 니 인생 살라던 울 아부지 인생은 어디 있나. 그 인생은 어디로 갔지.
저 달개비처럼 푸르렀을 울 아부지 인생, 그걸 내가 다 망쳤구나. 그랬어. 미안하고 안쓰럽고 후회스럽고… 핏덩이로 엉겨 붙은 감정이 달랑달랑, 끌려왔다. 그때 그 단칸방에서 내가 울 아부지 발목을 잡았어… 왁, 눈두덩이 뜨끈해지더니 그 저녁, 그 밤, 그 새벽길이… 울 아부지를 붙잡았던 모든 낮과 밤이 덮쳤다. 그 맑던 하늘이 흐려지고 흘러가던 구름이 뭉개지고 청둥오리가 푸드덕, 흩어졌다. 파아란 달개비가 짓이겨졌다. 내가 울 아부지 인생을 아작 냈어.
아부지 없는 집에서 혼자 맞는 첫 명절.
엄마한테 우리 집에서 지내자고 했다. 엊저녁부터 설사를 해서 화장실에 자주 가는데 남의 집은 불편하고 잠자리 바뀌면 잠도 잘 못 자잖아. 그냥 집에 있을래. 내가 먹던 설사약이랑 죽을 사서 갔다. 어스름해져서 좀 괜찮아졌냐고 전화했더니 대뜸 나 가고 나서 바로 감나무 베는 사람들이 와서 감나무를 벴단다. 봄이면 앙증맞은 하얀 감꽃이 피고, 여름이면 초록 감잎이 싱그런 우리 집 감나무. 가을이면 주황빛 감을 따서 껍질을 깎아 실에 꿰어 주렁주렁, 말리면 겨우내 곶감을 내어주던 우리 집 감나무. 감나무를 왜애? 이젠 늙어서 감도 열리지 않고 비만 오면 떨어진 감잎이 빗물을 타고 하수구를 막아버리는 통에 동네 사람들이 다 싫어해. 진즉부터 벨라구 했는데, 아부지땜에 못했잖어. 아우, 속이 다 시원해.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거들고 좋아해. 이제 쎄멘으로 공구리만 치면 돼. 늙어버리면, 열매를 맺지 못하면, 빗물에 잎이 쓸리면, 그러면 베도 되는 거냐고 묻지 못하고 '쓸모'에 대해서 생각했다. '쓸모'에 대해서만. … 머저리. 엄마… 근데 난, 서운해. 나는, 많이, 서운해.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죽음을 앞둔 딸 머피는 우주를 떠돌다 집을 떠나던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온 아빠 쿠퍼한테 말한다.
'전 아빠가 돌아오실 걸 알았어요.
어떻게?
아빠가 약속했으니까요.
그래, 머피. 아빠가 왔어. 이제 곁에 있을게.
아뇨. 어떤 부모도 자식이 죽는 걸 볼 필요는 없죠. 여긴 제 자식들이 있으니까 아빠는 가세요.
어디로?
브랜든한테로…. 우주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혼자서, 낮은 은하계에서요. 아마도 지금은 인류의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태양의 빛을 받으면서 긴 잠을 잘 자고 있겠죠. '
- 영화 <인터스텔라> 중
아부지랑 살면서 그리고 떨어져 나와서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부지는 아부지 인생 살았냐고. 지금 생각해 보니, 아부지라고 왜 아부지가 아닌 한 사람, 한 남자로 살고 싶지 않았겠나. 그런 적이 왜 없었을까. 그런데도 철딱서니라 볼 적마다 니 인생 살라는 아부지 그 말이 고까워서 나더러만 그러지 말고 이제라도 아부지 인생 살라고 다정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어느 시인은 오백만 년 전부터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닿은, 멍하니 짚이지 않는 허공에 마음의 전부를 세워놓은 무수한 사람들의 아득한 고갯짓으로 우주가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고 믿는다던데… 그렇다면 밤하늘 저 무수한 별은 이내 펑, 터진 그리움의 산물이런가.
달이 차오른다….
이번 추석엔 꽉 차오른 달 보며 어떤 소원을 빌어볼까나,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인다.
죽을 때까지 피땀눈물 흘리며 써야 하는 돈벼락 맞게 해달라고 할까. 기신기신 골골 말고 팔팔한 우윳빛깔로 더도 말고 딱 팔십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할까. 다 됐고, 걍 푸르른 내 청춘이나 돌려달라고 할까. 그때 그 저녁에 왜 버거킹에서 나와 골목길로 멀어지는 나를 붙잡지 않고 그냥 보냈냐고 그 애한테 물어나 보게. 왜 유리문 너머로 훔쳐보기만 하다 맥없이 보내버렸냐고. 여수 바닷가에서는 왜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뒤통수에다 대고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냐고, 이 바보 멍충이야.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보풀을 가지고 있다.
성가시고 볼썽사나워 뜯어내려 해도 언젠가부터 제 살점인 척하는 보드랍고 따스하고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나만의 보푸라기를. 나에게는 그런 게 몇 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울 아부지한테도 살면서 보들보들, 부들부들, 야들야들, 때로는 까끌까끌, 꺼끌꺼끌한 보푸라기가 하나둘, 생겨나지 않았을까. 때 타고 걸리적거려 떼어내려다가도 어쩐지 서운해 돌돌 말아 꽁꽁 숨겨둔 그런 보풀이.
좋아하는 배우 에단 호크는 어느 인터뷰에서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느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전 우리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시간'이라는 신적인 개념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개가 시계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만큼의 지능이나 DNA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어기, 바람 분다, 아부지.
팔랑팔랑, 이파리 흔들리는 거, 보이지?
올 추석, 내 소원은 말이야…
울 아부지, 새로 안착할 새 땅, 새 우주, 새 세계에선 새 태양 빛 받으면서 오백 년, 아니, 아니. 오백만 년 동안 딱 한 사람, 오직 아부지만을 기다리며 긴 잠에 빠져있는 어여쁘디 어여쁜 '아부지만의 브랜든' 만나 이쁜 집 짓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삐까뻔쩍하게 아부지 인생 꾸미고 가꾸면서 맨날맨날 하하호호 재미나게. 이번 소원은 꼬옥 들어주셔야 해요. 꼭이요, 꼬옥.
아부지, 오늘 밤은 한 번도 깨지 말고 자.
무서우면 하늘을 봐. 거기, 어둠을 등진 달님이 아부지 보고 있을 거야.
하늘땅 별땅만큼 사랑하는 울 아부지… 잘 자.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죽어, 조용히 무덤에 가면 그때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중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