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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다음 날

가채점표 옆에 놓인 컵라면과 김치

by 김성곤 교수

수능이 끝난 다음 날 아침은

늘 이상하게 적막합니다.

전날 밤 그 소란스러웠던 마음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만큼

집 안은 낯설도록 고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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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는

식지 않은 컵라면 용기와 김치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한밤중에 아이가 허겁지겁 먹었을 흔적이 남아 있고,

가채점표는 접히지 않은 채

테이블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아이는 턱을 괴고 앉아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젓가락은 여전히 그 자리,

부모는 말줄임표처럼

아이 맞은편에서 조용히 숨을 고릅니다.

그 침묵 속에는

아이와 부모의 마음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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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점수가 내 인생을 바꿔버리는 건 아닐까.”

“이 아이의 미래가 정말 여기서 달라지는 건 아닐까.”

이 질문들은 단지 점수 때문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상상력이

어제보다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본래 ‘큰 숨’을 가진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

세상을 한 번에 들이마실 만큼

큰 숨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궁금한 것이 많고,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먼저고,

실패보다 도전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아이의 숨부터 먼저 줄입니다.

틀리면 안 될 것 같고,

한 번의 선택이 인생을 결정할 것 같고,

한 발 잘못 내딛으면

모든 문이 닫힐 것만 같아집니다.

그렇게 두려움은

아이의 숨을 얕게 만들고

시야를 좁히고

생각의 폭을 점점 줄여갑니다.


점수가 아이의 가능성을 막는 게 아니라

두려움이 아이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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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두려움은 말보다 ‘호흡’으로 전해집니다

부모는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그 작은 불안은

아이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부모는 말합니다.

“괜찮다.”

“최선을 다했다.”

“결과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부모의 호흡은

이 말을 이기지 못합니다.

떨리는 눈빛,

깊게 들이마셨다 갑자기 멈추는 숨,

대화를 시작하려다 삼켜버리는 목소리.


이 모든 것은

아이에게 이렇게 전해집니다.


“나도 사실 많이 두려워.”

“우리 같이 흔들리는 중이야.”

아이의 마음은

부모의 표정에서 먼저 흔들립니다.

점수가 아니라

부모의 호흡이 아이의 뇌에서

첫 번째 경계 신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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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두려움은 아이들의 마음 위에 쌓입니다

수능 다음 날의 아침,

한국 사회 전체는

공동으로 하나의 감정을 나눕니다.


단톡방에서는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조용히 나갔습니다.

부모들의 커뮤니티에서는

‘0.1등급 컷 변동’ 글이

밤사이 수십 번 갱신되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학이 여전히 많은 기회를 열어준다는 걸.

그래서 아이들의 두려움도 커졌고,

부모의 숨도 점점 불규칙해졌습니다.

한국에서 수능 다음 날은

개인의 일기를 넘어

하나의 사회 심리 현상입니다.


그만큼

아이와 부모는

한 사회의 압력 속에서

함께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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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는 문을 여는 열쇠지만, 방향은 길을 만듭니다

수능 점수는

아이의 한 시점을 설명할 뿐입니다.

그 시점이

아이의 인생의 크기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점수는 문 하나를 여는 열쇠입니다.

하지만 문이 닫히면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방향은

문이 닫혀도 끝나지 않습니다.

방향은

새로운 길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대는

정답 한 줄이 인생을 결정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회로가 있고,

다른 진입로가 있고,

때로는 나만의 문을 새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방향을 가진 아이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잃지는 않습니다.


부모에게 드리는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나는 지금

아이의 점수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아이의 숨을 보고 있는가.”

점수는 비교의 기준이지만

숨은 존재의 기준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스펙도, 전략도, 조기투자도 아닙니다.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이가 다시 ‘큰 숨’을 들이마실 수 있도록

부모 자신이 두려움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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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다음 날, 우리에게 필요한 작은 의식입니다

아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점수보다 큰 사람입니다.”

그 한 문장이

아이의 숨을 다시 크게 엽니다.


부모도 자기 자신에게 선언합니다.

“나는 두려움으로 아이를 밀지 않겠습니다.”

이 선언이

아이의 마음에 작은 안전지대를 만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이 질문은

문을 여는 질문이 아니라

길을 여는 질문입니다.


큰 숨을 가진 아이는 흔들릴 수 있지만, 꺼지지 않습니다

아이의 가능성은 언제나

‘큰 숨’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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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은

그 숨을 줄이는 벽이 아니라

그 숨이 멀리 퍼져 나가도록

조용히 밀어주는 바람이어야 합니다.

수능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숨은

오늘 다시 시작됩니다.


어제의 점수는 어제를 설명하지만

아이가 선택하는 방향은

내일을 다시 설계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큰 숨’을 잃지 않은 아이에게

지금보다 훨씬 넓은 세계를 열어줍니다.


점수는 아이를 흔들지만,

아이를 붙잡아준 것은

언제나 부모의 숨이었습니다.


103동 언니, 김성곤 교수의 부모가 먼저 자라는 수업

Parenting Insights by Prof. Seong-G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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