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친구와 원주종합체육관에 다녀온 후로 농구에 빠졌다. 처음 본 경기를 졌을 때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친구에게 DB가 못한 게 아니야, 상대팀이 너무 잘했어, 하는 말을 했는데 지금은 저런 말은 절대 안 나오는 상태가 됐다.
허웅이랑 허훈 중에 누가 형이에요?
경기를 연달아 직관하고 나서 J님한테 “저 요즘 농구 보러 다녀요. 너무 재밌어요.” 하니 J님이 물었다.
- 근데 허웅이랑 허훈 중에 누가 형이에요?
- 네? 모르겠어요, 쌍둥이인가?
했는데 형제, 두 살 터울, Y대, Y고… 많은 걸 알게 됐다.
<슬램덩크>가 아닌 진짜 경기를 보고 나니 내가 특히 포인트가드의 움직임에 마음을 내준다는 것도 알았다. 두 번째 직관 때 서울 삼성 김시래 선수의 플레이를 본 후였다. 빠르고 대담해…. 경기 후 인터뷰에서 ‘저희가 잃을 게 뭐가 있겠냐’는 식의 말을 했는데 그걸 보고 또 반했다. 그 후 삼성의 경기를 지켜봤고, 잃는 게 많았다. 긴 연패를 끊은 팀은 DB와의 경기에서 2연승을 하고, 그 뒤로 리그가 끝날 때까지 모든 경기를 졌다. 감독이 사퇴를 한 상태였고,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으며, 용병들의 부상으로 나중엔 국내 선수들만이 코트를 채웠다. 그럼에도 나는 삼성의 경기를 챙겨 봤다. 시합도 전에 위기를 안은 선수들이 어떻게 경기를 끌고 갈지 궁금했고 무엇보다 이규섭 감독대행이 선수들에게 전하는 말이 좋았다. (기관과의 일 다 모르겠고) ‘난 그냥 내 거 하겠다’고 말하던 내게 작전 타임에 선수들에게 ‘지더라도 우리 거 하자’는 감독대행의 말이 박혔다. 점수가 크게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수들에게 “스코어랑 상관없이 농구하라고, 괜찮으니까.” 하는 말도. 누군가는 ‘저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겠냐’고 했지만 상황이 어떻든 코트 위에 섰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준비한 ‘우리 걸’ 펼쳐보고 그림을 보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과몰입이 심했다. 그 무렵 친구는 삼성의 김시래가 DB로 와서 허웅과 뛰어야 한다고 했고(딥시래), 나는 그 반대였다. 허웅이 삼성으로 가 김시래를 도와야 한다고 했다(삼웅).
그러게 DB 한창 잘할 땐 뭐하고
허웅이 속한 DB도 연패를 이어갔다. 원주에서 경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경기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내게 운전 중인 언니는 말했다. “그러게 DB 한창 잘할 땐 뭐하고.” 언니는 TG 삼보(2000년도 DB의 이름)의 팬이었다. 신기성 선수가 그 많은 팬들 중에서 언니의 이름을 알 정도였고, 가족들이 다 함께(오직 언니만을 위해) 잠실로 올스타전을 보러 가기도 했다.
20년도 더 지나 삼보에서 DB가 된 팀은 6위 자리가 걸린(플레이오프 진출이 걸린) 중요한 경기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길 것 같아! DB 기세 좋아! 에너지 좋아!!!’ 느낌표를 남발하며 친구에게 현장 분위기를 전한 지 얼마 안 돼 DB는 역전을 당해 그대로 지고 말았다. 9시가 넘은 시간에 친구는 뛰러 간다고 했다. 나는 원주행 막차를 타려면 고양체육관에서 강남 고속터미널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 전에 편의점에 들러 초코우유를 원샷했다.(농구에 빠지면서 왜 사람들이 펍에서 스포츠 경기를 보는지 알 것 같았다. 응원하는 팀이 잘할 때도 마셔야 하고 못할 때도 마셔야 하고 이겨도 마셔야 하고 져도 마셔야 하니까.)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하필 그랬다.
5, 6위 팀이 남은 경기를 모두 지면 DB에게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가혹하리만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런 희망 고문이 없었다. 각 팀의 순위와 팀마다 남은 경기 수를 따지며 경우의 수를 만들고, 행복회로를 돌려 DB를 6위에 올려놨지만 DB는 정규 리그를 8위로 마무리했다. DB가 LG와 원주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를 때 나는 격리 중이었다. 끙끙거리며 지켜본 경기는 다행히 평탄하게 흘러갔다. 신인 선수들의 귀여운 실수가 나오는 정도였고, 이해 못할 선수 교체가 이뤄지지도 않았다.
유튜브가 있었다
한동안 빠져 살던 농구 시즌이 끝나고, 격리가 한창이었지만 유튜브가 있었다. 유튜브엔 경기 풀 영상, 하이라이트, 작전 타임 클립 등 온갖 영상이 있었다. 또 각 구단들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다. 어떤 구단은 팬들의 니즈를 귀신같이 파악해 선수들의 매력과 더불어 캐릭터까지 뽑아내는 콘텐츠를 만드는가 하면, 어떤 구단은 ‘유튜브 이렇게 방치할 거냐’는 댓글이 달리는 곳도 있었다. 여러모로 시간이 90년대에서 멈춰버린 것 같은 영상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최악의 콘텐츠는 피디가 선수들에게 외모 순위를 묻는 영상이었다. 피디 자신도 전혀 궁금해 보이지 않는 그놈의 외모 순위를 끈질기면서 무기력하게 묻고 있었다. 무슨 마음으로 편집했을까, 궁금했고 피디의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영상이라니, 울고 싶었다.
농구에 빠지니 뭔가를 쓰고 싶었다
<슬램덩크>, <스페이스 잼>, <마지막 승부>의 뒤를 잇지는 않겠지만 농구 카테고리에 속할 뭔가를. 그런데 극을 쓰자니 그보다 좋은 스토리가 KBL 안에 있었다. 허재, 허웅, 허훈 부자의 이야기는 이미 픽션 같고,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라이벌 관계도 있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 역시 WKBL, KBL에 다 있었다. 넷플릭스로 눈을 돌리니 마이클 조던 다큐를 포함한 몇몇 작품과 함께 <라스트 찬스 대학: 바스켓볼>이란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딱 봐도 나의 언더독 기질을 자극하는 다큐였다.
다큐에 등장하는 ‘이스트 LA 대학팀(이하 ELAC)’은 전문대 소속에, 장학금도 없고, 코치는 노페이로 일하며, 밴드에이드도 없어 감독이 휴지를 갖고 와 다친 선수에게 붙여주는, 그런 농구팀이었다. 이 팀의 최종 목표는 전문대 농구 리그 우승 그리고 선수들이 좋은 대학(디비전 1)에 편입해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다. 팀은 전례 없는 연승으로 새 역사를 쓰고 있었는데 화면에선 늘 강한 팀을 만나 고전하다가, 선수들이 다시 중무장을 해서 이기는 것처럼 그려졌다. 슬쩍 보이는 전광판엔 ELAC가 20점 차로 앞서고 있는데 마치 접전을 펼치는 듯 혹은 팀이 위기인 듯 편집해버리면 어쩌란 것인가, 했지만 ‘편집자라면, 감독이라면, 작가라면…’ 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상대 팀이 멋진 플레이를 하면 위기일 수 있지, 아무리 20점 차로 이기고 있어도. 턴오버를 하면 위기일 수 있지, 아무리 20점 차로 이기고 있어도. 슛이 안 들어가도 위기지, 20점 차로 이기고 있다 한들…. 드라마틱한 전개와 함께 선수들 개개인의 캐릭터와 스토리도 이미 극을 뛰어넘었다. 국내 프로 농구 경기에서 감독들이 선수들에게 화나 있는 건 늘 있는 일이지만 선수들이 감독한테 화나 있는 건 드문 광경이었는데, <라스트 찬스 대학: 바스켓볼> 안에선 그렇지도 않았다. 선수들은 감독에게 자신이 화가 난 걸 어필했고, 존재 자체를 어필했다(선수들의 화는 대부분 선수 교체에서 비롯됐다. 지난 시즌 DB의 팬들이 화가 난 바로 그 지점이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ELAC는 우승을 꿈꾸지만 대회를 치르기 위해 올라탄 버스가 출발하기도 전에 토너먼트가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선수 중 누군가가 말한다. “2020년은 시작부터 구리네.” 이후 다큐는 그 시기에 누구나 그랬듯 힘 빠지는 전개를 보인다. 코로나19는 앞으로 우릴 얼마나 더 힘 빠지게 할까.
넷플릭스로 NBA와 미국의 전문대 농구 리그까지 거친 후에 농구 관련 극을 쓰겠다는 마음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뭘 쓰지 않아도 농구씬은 이미 충분히 재밌는 걸. 다시 원주로 돌아와 농구팀이 있는 지역에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한다. 선수들의 플레이를 눈앞에서 보고,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온갖 농구 영상을 섭렵하며, 기사를 찾아보고, 농구 잡지를 읽으며, 어쩌다 다른 나라 농구 리그로도 눈을 돌리는.
“원주에 뭐가 있어요?” 하면 말할 게 하나 더 있었다. 원주에 농구팀이 있었다.
*R석표 구하기
DB가 어느 지역에서 경기를 치르든 DB 팬들은 그곳을 홈 구장으로 만든다. KBL 올스타전 투표에서 역대 최다 득표를 받은 허웅이 있는 팀이기 때문이다. 원주에서 경기가 있는 경우, R석 표는 예매창이 열리고 삽시간에 매진돼 버린다(DB의 마지막 경기 표를 예매할 때는 30초 만에 R석과 S석이 매진됐다). 처음엔 뭣 모르고 취소 표를 노리려 KBL 어플을 들락거렸지만 표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나는 그곳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끊임없이 새로고침을 눌러가며 R석 표를 얻었다. 그렇게 앉은 R석은 선수들과 눈도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중계 카메라에도 잘 잡혔다. 좋은 자리지만 조금 부담스러웠다. 내겐 2층이 편했다. 상대팀 선수의 화려한 플레이를 봐도 “와..!” 할 수 있는 곳이. 혹시라도 선수들과 눈을 맞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며, 작전 타임 때 감독이 하는 말까지 다 들릴 좌석을 원한다면 트위터부터 가입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