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살 3년 차에 접어드는 고래와 미자의 편지
일요일마다 공을 주고받던 풋살팀 팀원과 이번에는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영 어색할 줄 알았는데, 퍽 자연스러웠어요. 편지의 시작은 팀원 고래의 패스였습니다.
미자에게
미자, 고래예요.
《축구의 이해》라는 책을 다시 들춰보고 있는데, 축구 기술의 기본 목표는 무엇보다도 볼을 정확하게 힘들이지 않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래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을 같이 연습하고 있다니. 축구장에 가면 신나는 이유가 다 있었어요.
지난주 훈련한 얘기를 하면서 무척이나 신나하던 미자의 얼굴이 떠올라요. 이제 드리블이 좀 된다고. 지지난주 미자가 코치님께 “코치님, 드리블은 언제 배울 수 있어요?” 하고 묻던 게 기억나요. 내가 아는 미자였어요.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재작년이었네요. 처음으로 다른 풋살팀과 경기를 뛰었을 때요.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가던 미자가 떠올라요. 집에 가던 미자에게 차창을 내리고 “미자, 괜찮아요?”라고 물었었죠? 하나도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아요.”라고 말하던 미자. 경기 중에 상대편과 무슨 문제가 있었나 했는데 이제야 그 사정을 정확히 알게 되었네요! ‘져서’ 그런 거라고.
“말도 안 되는 거죠, 진짜. 무슨 그 실력으로 경기를 뛰었나... 졌다고 화난 것도 웃긴 거지.”
난 미자의 ‘화’가 좋아요. 마음에 안 들어 화를 내고, 마음에 들기 위해 뭘 더 해보려는 미자를 보는 게 좋아요. 못하는 걸 잘해내려면 적어도 꾸준히 뭔가를 해내야 하잖아요. 그 꾸준히가 전 어렵거든요, 못하는 걸 견디는 것도 싫고. 근데 미자는 꾸준하더라고요. 내가 축구장에 올 때마다 여기 있었으니까. 나는 그게 신기했고, 멋있었어요. 벌써 이 주제에 대해, 당신의 꾸준함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미자는 ‘내가 그런가?’ 하는 반응이더라고요. 그래서 또 얘기해주려고요. “미자! 미자가 그렇다니까요! 꾸준하다고요!” 미자가 S에 대해 얘기해줬잖아요. S가 가진 에너지가 팀원들한테 전해지는 게 좋았고, 그래서 나도 S같이 에너지를 줘야겠다, 적어도 그렇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미자가 S에게 에너지를 배웠다면 저는 꾸준함을 배운 거죠.
저도 팀에 무언가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구장을 예약하고, 여유가 생기면 후원금을 넣고, 볼 가방을 챙겨 다니고, 오늘 배운 것이 무엇인지 글을 써요. 좋은 스트레칭 방법을 기억해두었다 나누기도 하고요. 축구 경기를 보다 단톡방에 생각을 남기기도 하고, 주장이 볼나방 인스타그램 계정에 남긴 글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축구장 바깥에서 팀원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일요일 날 봐요, 하고 인사하는 것도 그런 거예요.
《축구의 이해》의 도움을 좀 더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40쪽입니다. ‘축구에서는 무엇보다 올바르게 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기본은 복잡할 때 생각하면 참 좋습니다. ‘일단 이거부터 하자!’며 얽혀 있는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주거든요. 저 문장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건, 미자나 나나 같을 것 같습니다. 골반을 벌리고 발끝은 세우고 발목을 고정시키고 공이 복숭아뼈 아래에 닿게, 마침내 원하는 방향을 향해 편안하게, 툭! 팀원들이랑 셀 수 없이 많이 연습했던 바로 그거. 인사이드 패스요. 그렇다면, 우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본을 해 나가고 있다는 거네요.
미자, 다음에도 축구장에서 만나요. 미자와 같이 나도 꾸준하게 축구장에 나가겠습니다. 날이 갈수록 편안해지는 인사이드킥 자세처럼, 미자와 나의 드리블 자세에도 안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1년 7월 21일 수요일
고래가
고래에게
안녕하세요, 고래.
편지를 주고받다니 이상할 것 같았는데, 하나도 이상하지 않네요. 저는 집 앞 공원에 나가서 공을 차고 왔어요. 코치님이 드리블하는 데 3개월 걸렸다고 하셔서, 저도 해보려고요. 오늘은 매일 드리블을 연습하자고 결심한 지 4일째 되는 날입니다. 첫째 날은 한 아저씨가 오시더니 “운동하는 거예요, 연습하는 거예요?” 하는 질문을 주셨어요. 뭐가 다른 거지, 하다가 “둘 다죠.” 대답하면서 혹시 과거엔 선수, 현재는 감독을 맡고 있는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일까, 잠시 기대를 해봤어요. 아저씨는 “그런 거 말고 이런 걸 해야 돼.” 하면서 공을 발에 올리시더니, 리프팅을 단 한 개 성공시키셨습니다. 아저씨가 두 번째 공을 차내지 못했을 때, 저는 바로 공을 주워서 그를 외면해버렸어요.
어제는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고 공원으로 나갔어요. 술 취한 아저씨들이 또 술을 사서 벤치로 오시더라고요. 자리를 피해서 차다가, 아저씨들 취기가 더 올랐을 때 제가 차던 곳으로 돌아갔어요. 뭣도 아저씨들 눈에 안 들어올 것 같은 때. 오늘은 일찍, 8시쯤 집에서 나왔어요. 역시 벤치엔 술과 아저씨들이 계셨고, 혼자 맥주 한 캔 하려는 아저씨들도 속속 오셨어요. 이제 슬슬 그들이 신경 안 쓰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왼발 오른발 번갈아가며 드리블 연습을 하고 왔어요.
내일도 공원에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일은 인쇄소에 가야 합니다. 이번에 샘플로 받은 책 상태가 엉망이라, 배송 문제인지, 인쇄소의 문제인지, 둘 다인지 직접 가봐야겠어요. 원래는 내일 주문받은 책을 다 부칠 계획이었는데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네요. 그럼에도 제게 뭔가를 ‘내 맘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주어진다면, 누가 봐도 근사한 책을 만들고, 온갖 마찰, 트러블 없이 ‘깔끔하게’ 책이 나오게 하는 기술이 아닌, 공 잘 차고 잘 받고 잘 끌고 가는 기술을 얻고 싶네요. 왜 이럴까요.
처음 풋살팀에 들어갔을 때 저는 그냥 슥 묻어가는 팀원이 되려고 했어요, 있어도 없어도 티 안 나는. 그런데 생각보다 팀원들이 꾸준히 안 나오더라고요. 하하하. 그래서 별생각 없이 매주 공을 차러 간 제가 성실멤버가 돼버렸죠. 언제부턴가 일요일 풋살은 고정 스케줄이 됐어요. 별 이유는 없어요. 그냥 자연스러워요. 고래는 제게 자꾸 멋있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네요. 하하.
재작년 축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재미로’ 남자팀과 시합을 했었죠. 글을 쓰던 학부 때부터 영상을 만들던 시절을 거쳐 책을 만들어 파는 지금까지 저는 피드백이 필수인 일들을 해왔어요. 그날의 시합 결과는 제가 받은 최악의 피드백이었죠. 참혹했고요. 그런데 그 피드백은 너무 당연했고, 저는 화를 낼 자격조차 없었잖아요. 다시 그 팀과 붙는다면 지더라도 좀 더 성숙하게 질 것 같아요. 좀 더 멋있게 지고요.
코치님의 말대로라면 저희는 드리블을 하며, 공을 굴려가며 각자의 색을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제게 어떤 색이 만들어지고 있다니 짜릿하면서 근사하단 생각을 합니다. 아직까지 전 고래를 잘 몰라요. 제가 아는 볼나방FC 고래의 색은 그림책에 나오는 고래의 색이에요. 수면 위에 떠오른 몸은 검정, 수면 아래 가라앉은 배는 하양. 이 대비가 그림책에선 특히 선명하잖아요. 고래는 검정이기도 하고 하양이기도 하고, 또 검정과 하양 사이에 무수한 색들이 깔려 있겠죠. 고래가 어떤 색이든 꺼내 놓을 수 있는 팀 그리고 팀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래가 지금처럼 많이 다정하든 덜 다정하든 제게 고래는 고래예요.
《축구의 이해》 40쪽에 있는 말이요. 옆에선 두 시간 동안 경기를 뛰든 말든 훈련 내내 인사이드 패스를 주고받던 저희에게 참 와닿는 말이네요. 가장 기본이 되는 걸 정확하게 해내라고 ‘인사이드(패스, 슈팅)’를 집중적으로 훈련시켜주시는 저희 코치님이 참 좋습니다. 저는 축구를 잘 하고도 싶지만, 잘하고 싶거든요. 코치님과 함께라면 적어도 ‘인사이드’는 내 기준(저만의 기준이 또 있거든요...)에 미칠 정도로 잘하겠다는 확신이 있어요. 그 기준이 코치님의 그것에도 미쳤으면 좋겠고요. 드리블도…….
슬슬 배가 고파요. 그러고 보니 고래와 둘이 뭘 먹은 적이 없네요? 커피는 몇 번 마셨지만요. 아주 자연스럽고 좋아요. 제가 일요일마다 아침부터 운동복을 입어 두는(?) 것처럼요. 돌아오는 일요일에 또 아주 자연스럽게 풋살장에서 만나요.
고래, 아까의 이야기도 해야겠어요. 오늘은 아주 늦게 나갔어요. 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요. 오늘의 벤치는 온통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의 차지였어요. 그러고 보니 금요일 밤이었네요.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 중 시끌시끌한 팀이 떠나고 나서 저는 왼발 오른발 드리블을 연습했어요. 20분쯤 했을 때 지나가던 여자분이 절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셨어요. “혼자 안 무서워?” 물으시곤 왠지 안 가시더라고요. 신경 안 쓰려 노력하면서 계속 차다가 안 되겠어서 ‘무슨 볼일이라도?’의 얼굴로 다가가니 말씀하셨어요.
-항상 여기서 운동해?
-네?
-아까 어떤 사람이 자꾸 왔다 갔다 해서, 언니 이상해서 보고 있었어.
고래, 공은 언제 차야 할까요?
아침에 차면 ‘어떤 사람’이 안 올까요?
저 ‘언니’는 또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모든 게 의심되기 시작합니다.)
대낮에 차면 좀 나을까요?
머릴 자를까요? 아주 짧게요.
압박 브라도 할까요?
공 하나 차는데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이 필요할까요.
공 차려고 뭉쳐 있는 여자들이 보고 싶어요.
고래, 우리 운동장 밖에선 아니더라도 운동장 안에선 꼭 뭉쳐 있어요.
꼭이요.
2021년 7월 24일 토요일
미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