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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규 Nov 21. 2023

환상통

겨울 : 시작과 끝의 계절

  나에게 현실은 환상통 같은 거였다. 그저 평범하게 살기 싫었고 남들이 소위 말하는 특별한 직업 같은 걸 갖고 싶었다. 현실에서 나는 가난했다. 가난으로 인해 생긴 예전부터 자격지심과 가정환경을 탓하는 버릇 때문인지 직업적으로나마 안정감을 원했다. 그것이 나에게 기생충처럼 들러붙어 내 가족의 현실을 외면한 채 내 환상 속으로 조금씩 먹어 들어갔다. 그렇게 남들보다 오래 꿈을 꾸었고 잘 됐을 거라 믿었다. 실제로 잘 되었기도 했었다. 상사에게 인정받았고 최선을 다해 내 자리에서 나를 증명하려 했다. 2년 가까이 밤낮 가리지 않고 살았다. 꿈처럼 영원히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 버티면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영유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나에게 예전부터 무너져 있던 마음이 변수를 일으켰었다. 나의 환상이 현실에게 삼켜져 환각으로서 변해갔다. 꿈에서 깨었을 무렵, 내 앞에 마주한 것은 현실 속 나의 모습이었다. 불안과 우울증, 간헐적 공황장애는 나에게 현실을 도피하라 말했다.
  게임 속에서 현실을 감추고 그렇게 1년 2개월가량을 숨어 살았다. 또다시 환상 속에 나를 감췄었다. 그곳에서는 작은 노력으로 짦을 시간 동안 빠른 성과를 낼 수 있어서 좋았다. 현실의 내가 가려진 게임 속 나는 예쁘거나 강직했고 우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언제까지 이 생활을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며 꾸준히 나에 대해 글을 썼다. 남들이 보든 말든 나의 아픔에 대해 이곳에 정리했다.
  끝끝내 도달할 수 있었던 한 가지 결과는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몇 번의 자살 시도와 자해를 감행했지만, 끝내 나는 나를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살기로 했다. 평범함을 인정하며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 가끔은 환상통을 겪으며 이 번 일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인생의 첫 포기라 결심하며 현실을 외면했던 나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난 뒤 처음 보인 것은 거울이었다. 거울 속 나는 어느덧 사회에서 첫 성과가 보였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예전에 비해 초라해진 몸은 자존감을 깎고 내리기에 충분했지만 정신은 예전에 비해 맑아있었다. 취업을 하고 남들처럼 살아야겠다. 얼마 전 첫눈이 내렸다. 겨울이 찾아왔다. 끝과 시작의 계절인 이곳에서 나는 시작을 택했다. 내가 태어났던 2월도 겨울의 최장선이었기에 나의 시작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이번 겨울도 나에게 잘 될 거라 말해주듯 하다. 내 인생의 첫 파도가 지나갔다. 잔잔해진 파도를 바라보며 나를 다시 다듬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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