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네필, 사무직 되다
대표님과 나 둘 뿐이던 작은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 PM이었던 나는 어느새 나이도 서른이 넘어가고 있었다.
학부 때부터 석사까지 영화만 전공한 나는 할 줄 아는거라곤 촬영과 편집 뿐이었고 4대 보험을 들어주는 회사도 다녀본 적 없는 중고 of 중고 신입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동생에게 대표님을 소개 받아 입사했지만 내 적성에 맞을지 걱정되었다. 사무일은 커녕 밖에서 뛰어다닐 줄만 알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앞이 막막했지만 방송 선배들에게 귀여움 받기 위해 터득한 나만의 무기로 잘 작응해보겠다 결심했다.
바로 무대뽀 성실함. 누구보다 일찍 가고 늦게 퇴근하기. 네 일 내 일 할거 없이 적극적이기, 항상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겸손하게 일 배우기,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는 태도로 뭐든 열심히 하기.
하지만 현장에서 뛰던 내가 장점이라 여기던 것들이 사무실에서 도리어 내 발목을 잡을 줄 그땐 몰랐다.
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대표님께서 회사를 김포로 옮긴다는 말에 눈 앞이 깜깜해졌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송파, 그것도 하남시 바로 윗동네인 정말 서울 동남쪽 끝자락이었다. 회사도 그냥 김포가 아니라 거주 지역이라 지하철 조차 없는 조용한 동네였다. 출퇴근 시간 왕복 6시간이지만 그땐 정말 새로운 출발이 절실했다.
그렇게 김포로 출근하기 시작했고 미숙한 업무 처리에 매일이 야근, 게다가 긴 출퇴근 시간은 체력을 갉아먹기 좋았다.
결국 나는 이사를 결심했고 당시 살던 집을 내놓았다. 당시 대학원 휴학생이던 나는 LH로 대학생 임대주택으로 매우 싼 이자로 거주하고 있던 터라 한편으로 매우 아쉬웠지만 그만큼 열심히 일하면 보상받을거라 믿었다. 대학원 가기 전 방송 외주사에서는 경력을 인정받아 3200만원응 받았지만 새로운 분야라 다시 신입 초봉인 2800만원을 받게 되었다. 초반에 고생해도 인정받고 연봉이야 다시 높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초반 회사는 출퇴근 빼고 어려움은 없었다. 애초에 IT지식이 없던 나에게 모든 단어는 외계어처럼 들려 재밌었고 엑셀 수식은 노가다로 때웠다.
내가 못마땅했던 대표님은 내게 자주 화를 냈지만 당연히 내가 모자란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리 상처받진 않았다.
집까지 이사를 하고 회사 일이 적응되자 현장 외근도 자주 가게되었다. 나는 운전면허는 있지만 자차가 없어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당연 법카는 커녕 교통비나 식대 지원은 없었다.
나에게 어서 차를 사라고 투덜거릴 뿐 법인차를 제공해주거나 본인 차를 빌려주지도 않았다.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디자이너, PM, 영업, 운전 모두 잘해야했는데 대표님 눈에는 성이 안찬거 같았다..
월급은 2년 째 동결, 새로운 직원들이 하나 둘 들어왔지만 경력직은 아무도 없었고 대표님은 그들 뒷담화만 반복했다.
김포라서 사람이 안구해진다면서 이사 오자고 말한 내 탓이라고 내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경력있는 디자이너가 면접을 보고 가면 아이때문에 외근이나 출장이 어렵다며 아이 있는 여자라서 탈락시킨건 내가 아닌 대표님인데 말이다.
아이가 없는 나와 동갑인 무경력 여직원을 뽑은 대표님은 뒤에서는 멍청하다고 욕을 했고 앞에서는 운전 잘해서 좋다고 추켜세웠다.
나에게는 회사에서 밥을 사주는건 당연한게 아니라며 대표님과 함께 식사를 해야했다. 딱히 입맛이 없지만 얻어먹는 입장과 대표님을 의전해야 하는 분위기로 하루하루 체중이 줄었다. 후임에게는 대표님이 안계셔도 법카로 식사 챙기라는 말을 하는걸 보고 마음이 쓰렸다.
나는 후임들이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과장을 달았고 대표님은 내가 잘해서 승진한게 아니라 잘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후임을 가르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제자리 걸음인 연봉으로는 오른 물가와 세금으로 생활만 더 쪼들렸다.
2년차에 물과장이 된 나는 UI, 애니메이션, 3D모델링, 산출물 작성, 하드웨어 설계, 제안서부터 킥오프 미팅, QA, 프로그램 설치와 유지 보수를 위한 출장까지 모두 했다. 전문 분야도 없는 올인원 패키지가 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