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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 윤 May 09. 2023

(10년째) 초보주부지만 70점이라도 좋습니다.

전업주부인 내게 살림과 육아는 곧 직업이다. 집안일은 일상생활의 필수인 동시에, 작업량이나 소요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서 올바르게 수행한다는 것을 파악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성실하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네가 몇 점짜리 주부냐라고 물었을 때 60점 이상은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더 잘하는 엄마가 되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고, 돈 한 푼 못 버는 백수나 마찬가지다 하면서 동굴 속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10년쯤 하면 살림이 늘 줄 알았다. 매일 오 첩 반상을 차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출근하는 남편의 옷을 다려두고 늘 향기가 나도록 만들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기세대로라면 10년이 아니라 30년 후도 미지수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완벽한 교육 환경은 커녕 사자후를 내뱉고, 머리와 옷은 산발을 하고, 이리저리 허둥대며 급한 쓰레기를 치우고 입에 겨우 넣을 수 있는 밥을 만들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린다.





전자 게임을 하다 보면 마지막에 점수가 나온다. 이번 스코어는 55점입니다. 재도전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하루는 몇 점일까?



난 너의 손만 보고 엄청난 살림 고수인 줄 알았어. 20대 초반인데도 피부가 건조해서 손등이 다 터진 걸 보고 남편은 너무 집안일을 많이 도와서 주부 습진에 걸렸는 줄 알고 애틋함을 느꼈다고 한다. 현실은 그냥 손 잘 트는 여인이다. TV에 나오는 프로 가사도우미처럼 집안일을 말끔히 끝내놓고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치워도 치워도 너저분한 집에 한숨을 쉬며 애들이 남긴 밥을 밀어 넣는다.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단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몇 점이라고? 55점입니다. 역시 재도전…아니, 조금만 여유 있게 점수를 매겨보자.






살림에는 점수표가 없다. 모든 사람은 가사를 하는 데에 있어 자신만의 선호도, 습관 및 일과를 가지고 있다. 요즘같이 생활의 고수 살림의 팁이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꼭 그들의 룰대로 따라 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1분이면 해동된 고기를 완벽하게 녹일 수 있는데, 내가 그냥 냉동고에서 꺼내어 5시간이 걸렸더라도 100점에서 빵점이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내 식대로 서툰 방식이라더라도, 살만하고 안전한 생활환경을 만들어 둔다면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5점 추가.



그리고 살림을 배우고 익히면 실력이 늘기는 한다. 실패하는 날이 많지만, 그것도 학습 과정의 일부임을 잊지 말자. 솔직히 아무리 잘 못한다고 하더라도 10년 전의 참혹한 내 실력에 비하면 그나마 지금이 양반이다. 예전에는 블로그나 유튜브 설명을 보고도 뭘 하라는 건지 몰랐지만, 지금은 요리나 청소를 어설프게 흉내는 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기죽지 말자. 10점 추가.



살림이 개인으로서 나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아니다. 삶은 장기전이다. 완벽을 위해 매일매일가족들을 잡아가며 깨끗한 집을 만드는 것보다, 적당히 균형을 잡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낫다. 때때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정신 건강, 신체 건강 및 타인과의 관계를 희생하는 대가로 올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돌보고 웰빙을 우선시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마음은 편해졌지만 0점 추가.






얼추 추가 점수를 더 주고 나니 70점 정도가 되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진 점수에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른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영화 앙:단팥 인생 이야기)



100점을 받으면 완벽한 하루다. 하지만 100점이어야 내가 올바르게 살고 있다는 증거냐? 그건 나도 모른다. 70점짜리 하루지만 행복하다면 되었다. 100을 맞추려고 무리하는 자신보다는, 스스로 70점을 줄 수 있는 웬만한 적응력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싶다.





10명의 고객 중 7명이 여기 괜찮은 데라고 생각한다면 성공한 맛이라 생각한다. 10명의 고객 모두의 입맛을 맞출 수는 없다. 평균을 벗어난 고객들의 입맛은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마카롱 11억의 기적-김혜경 님)



그러니까 스스로,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된다. 밥을 도저히 못 만들겠는 날에는 시켜 먹는 대신 아이들이 까르르 열 번 이상 웃을 수 있도록 놀아주고, 청소를 못하는 날에는 자기 전에 서랍 한 칸이라도 정리를 해본다. 그렇게 나름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하루하루가 70점이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이 세상을 잘 살려면 단단해야 하지만, 잘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단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비교우위’를 가진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절대능력치로는 부족하더라도, 내가 해서 남들이 편해지고 덕분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들. 남들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내 힘으로 쌓아 올린 소소한 작은 습관들. 건강식이다 못해 싱겁기만 한 음식. 어딘지 엉성하게 묶은 막내의 머리. 5분 만에 휘리릭 돌려버리는 청소기.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충족감으로나마 오늘의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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