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서양_니샤 맥 스위니>
*해당 리뷰에서는 지리적 서양과 문화적, 사회적, 이념적으로서의 서양을 구분하기 위해서 전자는 서양으로 후자는 <서양>으로 표기하였다.*
저자가 책을 쓴 목적을 말하기 전,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에게 <서양> 이란 무엇인가?
나는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 서양이란 고대-그리스에서 발전하여 중세시대에 그 암흑기를 맞이하였고,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을 거쳐 발전한 문명이라고 배운 기억이 난다. 지리적으로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이념과 정치적으로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로 대변되며, 인종적으로는 백인이 떠오른다. 이러한 전형적인 <서양>에 대한 배움의 내용은 대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서양>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각종 미디어와 영화에서도 이러한 <서양>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예시로 들기 민망한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 <300>에서는 평화, 자유, 신체적 우월함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스파르타인이 나오며, 이에 대적하는 <동양>의 페르시아는 폭력, 억압, 신체적 열등함, 문란한 성문화, 비열함을 나타낸다.
정체성이란 타자와의 차이 또는 대비를 통해 형성된다. 권위주의를 내세운 중국의 부상,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의 갈등은 <서양>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히고 있는 듯했다. 이들과 대결하는 <서양> 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의 해체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대표하며,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부터 선형적으로 발전되어 온 문명이라는 인상을 본인은 가지고 있었다.
시진핑의 중국과 푸틴의 러시아는 서양 중심의 질서에 대해 실질적 위험이었지만, 붕괴를 불러올 만큼 중대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트럼프의 재집권은 이러한 생각을 바꿔 놓았다. 누구보다 <서양>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국가들이 <서양>에 대한 나의 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https://www.ft.com/content/17344ba0-563a-4796-a2b7-7e8095e6dc78
파이낸셜 타임스의 Martin Wolf는 ‘America First’와 민족주의의 부상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여 단결해야 할 서양을 오히려 분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여기서 트럼프 행정부의 방향이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방향은 적어도 그동안 <서양>으로 대표되던 이념들에 어긋난 보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부터 누적되던 미국과 유럽의 갈등은 트럼프의 집권으로 터져 나오는 듯이 보였다. 적지 않은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었음에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자 했던 서양이 이제는 실제로 분열되고 있음이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분열을 멈추고 러시아와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전통적 <서양>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8세기에서 20세기, 그 누구도 서양에 대항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서양> 적 가치를 말이다.
이제 다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보자. 저자가 이 책을 쓴 의도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서양> 이 사실은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복무해 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서양>이라는 이야기는 비록 창조되었으나 그것이 원래부터 존재하던 사실처럼 작동하며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그것이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단순히 이것을 고발하고 알리기 위해 책을 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즉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서양> 이야말로 <서양>의 본질이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재생산된 <서양>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서양>이라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서양>은 분명 제국주의의 폭력과 압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강력하긴 하지만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몇몇 사람들은 과거의 <서양>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서양>은 제국주의라는 실패한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시대에 부합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서양>은 어때야 하는가? 중국과 러시아가 서양의 실질적 경쟁자로 부상하고, 서양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국가들도 분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서양>을 만들어갈 것인가?
적어도 실패가 증명된 과거의 <서양>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다. 앞으로의 <서양>은 과거의 <서양>을 버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또한 올바른 <서양> 이 어때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즉 <만들어진 서양>이라면 앞으로의 <서양>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그 가이드를 제시하기 위한 책이다.
우선 <서양>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인물들을 소개하고 싶다.
17년간 영국의 수상을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고대의 두 위대한 종족>으로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꼽으며, 그들은 서양의 우월한 문명의 기초를 다졌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로마의 문명은 다른 어떠한 문화로부터도 영향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 순수성을 보존하며 성장해 왔다고 말했다.
그에게 <서양> 이란, 가장 뛰어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순수성을 계승한, 또한 그렇기에 가장 뛰어났으며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곳이었다.
버락 오바마는 2016년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의 발상지로서 아테네를 지명하며, 오늘날 <서양>이 이러한 민주정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고 연설했다. 연설의 전문은 아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hrough all this history, the flame first lit here in Athens never died. It was… nurtured by the Enlightenment… ‘We, the People’ shall rule;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그에게 <서양>이란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이은, 문화적 계승자였다.
중세 이슬람의 심장이었던 바 그다 그에 세워진 지혜의 집은, 9세기 초 칼리파 알마문( Al-Ma'mun)에 의해 건립된 도서관이다. 칼리파의 총애받던 학자인 '알킨디'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다양한 지식들을 탐구하고 번역하였다. 이중 일부는 후대의 서양에 전해져 고대 연구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서양>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에게 <서양> 은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었으며 자신들과 구분되는 개문화적, 지리적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은 <서양> 문명의 계승자였다.
(물론 그에게 현대의 <서양>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 세 사례에서 보듯이, 시간에 따라 <서양>이라는 개념은 필요에 따라 달라졌으며, <서양>의 계승 역시 현재의 서양이 주장하는 대로 선형적이며 지리적으로 유럽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르네상스야 말로 현대적 의미의 <서양>이 창조된 시기였다. 그들은 로마-그리스를 하나의 연속되며 계승된 문화권으로 상상했다. 그들의 문화적 업적과 성취를 강조하며 자신들이 그들의 유일하며 적법한 계승자라는 서사를 써 내려갔다.
그러나 <서양>은 르네상스, 과학혁명을 거쳐 개화하기 위해 중세에 잠들어있던 씨앗이 아니다. 서양이 타자로 규정하는 동양에서 역시 <서양>은 계승되고 발전했다.
이렇듯 저자는 다양한 인물과 시대를 거쳐가며 서양이 주장하는 <서양>이 결고 선형적이며 유럽에 한정되어 발전한, 그리하여 순수성을 지닌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렇기에 <서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제국주의 역시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저자는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서양>이라는 개념을 해체하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서양>은 어때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질문한다.
시대가 기존의 <서양>을 해체하고 있으며 서양은 앞으로의 <서양>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만큼, 대한민국 역시 동일한 도전에 처해 있다.
글의 저자는 미국의 국회 도서관에 세워져 있는 16개의 동상을 보며 그들이 정말 서양을 대표할 수 있는지, 아니면 <서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동상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수한 외세의 침입에도 굴하지 않았던 민족의 정체성과 순수성을 상징한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하고 계신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이 이뤄낸 문명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한민족>의 정체성은 국가의 단결과 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성 역시 정치와 사회의 필요에 의해 강조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민족성의 강조는 한국사 학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우리가 겪은 '일제강점기'라는 아픔은 우리 민족은 하나라는 정체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한국사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조국 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공동체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독립에 대한 방법론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다르게 나타났다. 이는 사소한 조직 내의 갈등이 아니라, 암살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갈등이었다(김립 피살 사건 등).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하나 된 목표 아래 똘똘 뭉쳐진 공동체였다고 배운다. 물론 그러한 역사의 재구성은 독립 후 신생 국가였던 대한민국을 안정시키고 민족성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유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지금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갈등으로 무너지고 있다. 남녀 갈등, 빈부 격차, 세대 간 갈등 등 너무나도 명백히 사회 전반에 드러나고 있는 이러한 갈등을 기존의 <한민족>이라는 서사로 해결할 수 있을까?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한민족>이라는 이야기로 우리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아마 <만들어진 서양>의 저자가 한 질문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그들로 대표되는, 즉 타인과의 배타성에 초점이 맞춰진 <한민족>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국가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민족성을 앞으로 정의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