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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20. 2019

역할을 나누고 바꾸고

- 남편은 우리 집 국수 장인

결혼 30주년이 지났다.

내가 청소하면 남편은 밥을 준비한다.

내가 분리수거를 하면 남편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옷걸이에 가지런히 널고 있다.

   

산다는 것은 규칙적으로 배열된 보도블록을 따라 걷는 것과 같다. 아직은 싱크홀을 만나지도 수렁에 빠지지도 않았다. 가끔 삐딱하게 놓인 보도블록 밑에 감추고 있던 진흙탕물을 맞았을 뿐이다. 긴 시간 지루하게 뻗은 길을 걷다 잠깐씩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그런 어지러움을 못 견딜 때도 있었다. 견디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지러움 속에서도 나는 뭔가 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먹이고 내보내야 하는 식구들이 있었다. 그런 순간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게 되었다. 처음엔 그렇게 뒤죽박죽 나누던 역할이 이제 정리가 되고 있다. 시작부터 자연스럽지는 않았으나, 30년의 여정이 우리를 그렇게 바꿔 놓았다.


역할이 뒤섞일 때는 불편했다. 성성하게 푸르던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다 비가 내려 짓이겨지는, 그것들을 밟고 지나가는 마음 같았다. 불편함을 서로 크게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용조용 그때그때 서먹서먹, 했다. 그렇지만 비가 그치고, 낙엽들이 바짝 마르고 구르다가 누군가의 발밑에서 바스락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형체를 감춰버릴 때처럼, 바뀐 역할은 안정을 찾아갔다. 어느 순간 바통터치도 없이 하나씩 자연스러워졌고 지금도 바꾸고 있다.


남편의 국수는 그 시작이었다.

지금은 잔치국수와 비빔국수를 동시에 진행하는 고난도의 스킬을 선보인다. 집밥 요리 경력 3년 차, 옆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고는 뚝딱 상을 차린다. 두 개의 화구에 불이 동시에 켜지고 물이 끓기 시작한다. 한쪽 물에 국수를 빙 돌려 넣고 찬물을 준비한다. 다른 쪽 끓는 물에 국간장과 멸치 액젓을 넣어 간을 맞춘다. 청양고추, 파, 호박, 새송이버섯까지 모양을 갖춰 썰어 넣고 달걀을 두 개 풀어 넣으면 먹음직스러운 잔치국수 국물이 완성된다. 찬물을 적절히 넣어 준 국수는 투명하게 색을 바꾼다. 그러면 채에 거르고 찬물에 넣어 빡빡 씻어준다. 한쪽에서는 양념이 준비되고 있다. 양념장은 김치 쫑쫑 썰어 놓은 것에 고추장 조금, 요리당 조금, 참기름에 깨소금까지 넣어 준비하면 도마에는 어느새 고명으로 쓸 오이가 놓인다.


국수를 시작으로 우리 집 냉장고는 즉석조리식품으로 가득 찼다. 불과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되는 양념 고기, 볶음밥, 각종 탕 종류와 매콤 족발, 부침개 등. 처음엔 그런 것들을 사 와 프라이팬에 데운 후 그대로 상에 놓았다. 지금은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 한다. 꺼내기 귀찮아 쓰지 않던 접시들도 지금은 밖으로 나온다.


언젠가 이웃에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민들레 국숫집이 방송을 탄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고 남편은 나이 드신 분들이 아무 때고 와서 배불리 먹고 갈 수 있도록 국숫집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국수에 대한 자신감이 만들어 낸 포부는 아니었다. 평소 국수를 좋아하는 남편은 싸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국수를 찬양했다. 국물만 잘 만들어 놓으면 면만 준비하면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그 음식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남편의 꿈을 응원하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오늘도 푸짐한 국수 한 상이 차려졌다. 배추김치와 알타리김치가 든 반찬 용기가 중앙에 놓인다. 잘 삶아진 국수가 넉넉히 들어있는 커다란 국수 대접들이 바로 세팅되고 국물이 그득 담긴 냄비가 등장한다. 각자 그릇을 가져가 국물을 가득 퍼 담고 맛있게 먹는다. 이미 맛있게 비벼진 비빔국수 양푼도 곧 뒤를 따른다. 두 가지를 동시에 맛보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주방을 차지한 남편은 가장 늦게 자리에 앉는다. 역시 주부는 빛나지 않는, 그러나 꼭 있어야 하는 ‘신 스틸러’다. 가족을 만족시켰다는 뿌듯함이 남편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음식에 눈이 먼 가족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입으로 넣기 바쁘다. 우리 집 국수 장인인 남편의 푸짐한 밥상을 함께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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