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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ug 19. 2023

작가가 세상을 다정하게 바라본다면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말입니다. -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글쓰기는 다정함이다. 소외된 것들에 시선을 돌려 다정한 마음으로 토닥여주는 것, 그것이 글쓰기고 글을 쓰는 사람의 역할이다. 다시 말해 '몰라도 되는 세계', 외면해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작가 김연수의 지향점 같다. 


김연수의 책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수록된 작품은 동네 작은 서점에서 함께 거주하던 작가들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 낭독회에서 읽어주기 위해 쓴 소설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신예 작가들을 위한 글이면서 소설 창작을 원하는 사람들을 향한 진심을 담은 소설 모음이다. 


낭독회 이후 소설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됐다는 작가의 말은 인상적이다. 덩달아 작품을 읽으며 막연하게 어렵고 막막했던 글쓰기에 대한 기존의 내 생각도 조금은 달라지는 것 같다. 


우선은 짧은 소설들을 통해 길이에 대한 부담을 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반드시 복잡한 플롯을 가져올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짧으면 십 분, 길면 한 시간이 넘도록' 읽을 수 있는 작품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창작의 바탕에 다른 무엇도 아닌 다정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보다는 구석에 처박히고 정돈되지 않은 것에 눈길이 많이 간다. 사람 자체가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절박한 삶의 흔적이 명백한 그것들은 한번 머릿속에 들어오면 쉬이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이야기의 방향을 밝게 바꾸면, 좀 더 깊이 탐구하면,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다. 초보 글쟁이라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변명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다정함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절대적으로 크거나 작은 것이 없는 세상'에서 다정한 시선만이 모두의 눈에 훤히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중요한 작가의 덕목이라는 걸 이해하게 된다.



신선함


낭독을 위한 소설이라는 말은 신선하다. 마치 마실 나온 것처럼 삼삼오오 가벼운 마음으로 모이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렵지 않은 글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각자의 삶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 나눔이 있다. 앉은자리에서 진심 어린 삶의 모습이나 소감이 나오면 새로운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소설 창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소설 작법의 샘플이자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한다. 스치는 한 장면의 깊은 통찰이 '이야기'라는 마법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무언가)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실사판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이가 적잖은 내게는 해결될 수 없는 숙제 같은 나이듦의 증상들에 대한 걱정이 있다. 그에 대한 깨달음도 준다. 모든 감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지워지는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되고 백지가 자연스러워진다고. 책을 읽다가, 생각을 모으다 어느새 사라져 기억의 조각조차 남지 않는 현실에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다시 읽고 사라지기 전에 얼른 메모하는 수밖에.


또 본질은 감각 자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감각 대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감각하는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크거나 작은 것이 업'고 '멀고 가까운 것만 있'다고. 그러므로 대상의 크기는 거리의 문제이고 그 위치는 우리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언젠가 시각장애의 본질은 보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나이듦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각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의 감각 대상에서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감각대상에서 멀어지면 모든 존재는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 '풍화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소설가가 해야 할 일도 제시한다. 소설의 경향이나 출판시장의 흐름, 베스트셀러를 통한 독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글 쓰는 사람이 그러한 것들에 매몰되는 순간 자신의 세계는 지워지고 만다고 말한다. 소설가는 꿈꾸는 사람이며 지위와 명예, 돈에 매몰되어 그것들을 쟁취하려고 하는 순간 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냉혹한 현실만 남게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소설가의 재능이란 꿈꾸는 것이 전부다. 꿈꾸는 능력은 꿈을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꿈같은 현실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이 선물에 나는 지금까지도 만족하고 있다. - '고작 한 뼘의 삶'


지나온 시간 동안 수없이 많았던 불행한 사건들이 차례로 잊히고 있다. 마치 누군가 완벽하게 지우는 것처럼. 피해자와 가족들에게도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건 악몽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붕괴되고 끼어 죽고 빠져 죽는 현실. 그런 땅에서 우리가 돌봐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집중한다는 것

▲  서점과 책.ⓒ unsplash


삶은 의문 투성이다. 의문을 갖는 순간 다음 물음이 따라온다. 의문은 이야기가 되고 세상에 퍼진다. 마지막 작품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작가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궁금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고,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목격하고, 그것을 돌보는 사람이 될 때 마음이 되고 글이 된다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글의 매력에 구속된다. 그들은, 마치 아기가 탯줄을 통해 나와서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는 것처럼 규칙이나 방법을 미리 완벽하게 숙지하고 글쓰기를 시작하지는 않는다. 무작정 시작되었지만, 글쓰기는 나와 타인, 그들이 속한 세계와 현상, 긍정과 부정, 모순과 아이러니에 집중한다. 그 사소하면서도 소중한 삶이 이뤄내는 성과와 사람이 사람다운 현실을 담아내기 위해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 2063년의 미래의 모습이 나온다. 전쟁과 기후 위기의 시간, 폐허와 공포가 만연한 척박한 세상이다. 또한 오늘은 '모두가 죽고 난 뒤의 여름'이 서서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새로운 글을 준비하는 작가들을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작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 너무나 많은 여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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