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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19. 2023

그림책을 봐야할 사람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일상이 무료해질까 두려워 요일마다 강의 하나씩을 잡았다. 나름 계획을 잘 세워 적절한 쉼을 허락한 여유 있는 일정이었으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이 틀어지며 중복되어 하나를 놓치기도, 며칠을 빈둥빈둥해야 하는 시간이 생기기도 했다.


그중 놓치지 않는 하나가 그림책 지도 과정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하며 연령이나 정신 단계에 맞는 읽기를 강조했던 터라 유아나 아동을 위한 그림책은 지금까지 관심 밖이었다. 단순하고 간결한 내용이 밋밋해서 재미없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 학교를 그만두니 아이들의 결혼과 그 이후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는 새로운 가족, 예쁜 아이에게 외면받지 않고 재미있는 할머니가 되어 그림책을 읽어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그림책 강의를 신청했다. 그림책 구연동화, 그림책으로 마음 읽기, 그림책으로 마음 치료하기 과정도 비슷한 이유였다.


그림책을 접하며 변화가 있다면 이제는 그림책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겸손해졌다. 그림책에도 인간과 삶과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가볍지 않게 다가왔다. 삶의 질곡을 표현하는 방식은 부드럽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도 사납지 않아 마음이 몽글몽글 순해지는 것 같았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텍스트보다 오히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  춤추는 수건 | 개암 그림책 11 / 제성은(지은이), 윤태규 (그림)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병은 통과의례 같다. 내가 아프거나 내 짝꿍이 아프거나. 제성은의 <춤추는 수건>에는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남편을 돌보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 할머니는 그동안 쌓인 수건들을 깨끗하게 삶아 빨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은 너무 낡고 지저분한 수건 하나를 버리는 날이다. 수건들은 저마다 자기가 버려질까 봐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할머니에게 수건은, 부부가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다. 비비고 삶아 깨끗해진 수건이 바람에 팔랑이는 것을 보며 할머니는 수건에 새겨진 문구 하나에 추억 하나를 차례로 떠올린다. 잠시 접어두었던 소중했던 순간의 기억들이다. 할아버지가 다녔던 직장의 워크숍이나 할머니의 고희연, 손녀의 돌잔치까지 수건 한 장에는 지난 시간 파란만장했던 역사와 감정, 가족의 연대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정리수납을 배우며 집의 낡은 수건은 걸레의 단계를 거쳐 버려졌다. 수건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의 힘은 강력했고 어떤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하얀 호텔식 수건으로 정리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춤추는 수건>을 읽고 버렸던 낡은 수건에 대한 미련이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회갑연, 학교 체육대회, 친지의 돌잔치와 개업, 승진 축하 자리에서 가져온 크기도 색도 제각각인 것들은 결국은 지나온 삶의 기록이고 추억이라는 사실이 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  나는 기다립니다... | 속 깊은 그림책 2 / 다비드 칼리 (지은이), 세르주 블로크(그림), 안수연(옮긴이)


채색이 없는 그림책도 만났다.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에 색은 하나다. 빨간 실 하나의 연결로 그림책이 완성된다.  빨간 실을 따라 꼬마가 성장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한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결혼하고 자녀들의 안부전화를 기다리는 과정도 빨간 실이 안내한다. 노인이 되어 아내가 떠나고... 슬픔을 견디고 노년의 계절을 보내며 자녀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손주를 기다리는 시간도 빨간 실 하나로 이어진다.


채색도 없고 인물의 표정이나 표현이 풍부하지 않아도 읽는 순간 마음을 뜨겁게 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처럼 그림책은 철학적 깨달음과 함께 지면 한 페이지마다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엉성한 그림이지만 인물에게 동화되고 조급했던 노년의 여정을 돌아볼 여유를 준다. 나의 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안내는 현재의 삶을 인정하게 하고 안정되게 만든다.


글이 없는 그림책도 있다. 이수지 작가의 <파도야 놀자>는 작은 에피소드로 출발한다. 바닷가에 놀러 간 아이와 파도. 바닷가에 와서 파도를 만나고 낯선 풍경에 적응하고 아이답게 파도와 한판 힘을 겨루는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 펼쳐진다.


파도의 사납고 차가운 느낌도, 거대한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에 대한 두려움과 생소한 첫 경험도 놀이가 되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반짝거린다. 간결한 그림이지만 파도가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은 작가의 역량이고 들을 수 있는 귀는 독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백세 시대에 인생의 중반부를 가뿐히 통과하고 시계는 인생의 후반부를 향해 돌진한다. 무섭게 질주하는 시간은 차분히 돌아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사람들과의 관계와 소통은 이어지고 매일 마주하는 일상임에도 낯설고 두려울 때가 있다.


이때 그림책이 순간 멈춤을 허락하는 것 같다. 천천히 생각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과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도록. 같은 이유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육적 관점도 놓치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식과 정보는 물론이고 세상을 사는 지혜와 선한 영향력을 알게 하고, 비밀스럽고 놀라운 세계에 대한 상상을 발휘하게 한다. 또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지게 하고 성취의 자신감을 갖게 한다. 


어쩌면 그림책은 인간의 모든 단계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다. 이 그림책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서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되고 일생을 지켜줄 스승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늘도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를 보며 나눔과 베풂, 함께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검피 아저씨의 드라이브>를 통해 '우리'라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세를 나눈다. <땅속 마을의 수상한 이웃>에서는 토양오염에 따른 땅강아지의 재난을 마주한다. 방사능 오염수로 인해 소금 사재기까지 벌어지는 현실은 다급한 마음의 반영이지만 합리적 대안은 아니라는 것을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다.


요즘 집 밖을 나서면 도로에 정치 현수막이 즐비하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비정상이 정상을 덮어버리는 세상, 폭력과 상처가 사방에 걸린 현실을 확인한다. 거짓과 야유, 적색경보가 가득한 이 땅에서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부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곤 한다. 


더불어 그러한 난폭한 현실을 만든 어른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부족한 당신이라면 그림책을 보시라! 과오에 대한 인정이 절대 안 된다면, 나눔과 배려가 부족하다면,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림책을 봐야 하는 중요한 단계를 놓친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그림책을 통해 제대로 된 삶을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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