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 소설 <고래>
2004년 출간된 소설을 2023년에야 읽었다. 이유는 통속적이다. 이 작품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능청스럽게 풀어나가는 서술방식'과 '기괴한 등장인물, 기이한 음모, 마법적 요소가 뒤섞인 롤러코스터 같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노파, 춘희, 금복 등 다양한 등장인물이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왜곡되고 뒤틀리고 불안해하는 인물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라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천명관의 작품 <고래> 이야기다.
아쉽게도 지난 23일(현지시간) 발표에서 <고래>는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전설과 신화, 민담 같은 설화와 야담과 괴담, 기담 등 온갖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가감과 변형을 통해서 그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소설 속 화자를 등장'시켜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적절하게 버무린 작가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충분히 큰 상에 이름을 올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은 노파와 그녀의 애꾸눈 딸, 금복과 그녀의 딸 춘희의 삶의 궤적을 중복해서 보여준다. 노파와 금복은 불가능한 꿈을 실현하고 무적의 적수를 이긴다. 노파와 금복도 그렇지만 애꾸눈 딸과 춘희를 보면 보통 사람이라면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직면하고 기꺼이 견디는 모습이다. 특히 금복의 삶은 심사위원들이 말한 돈키호테를 떠올린 이유가 납득이 될 정도다.
Soñar lo imposible soñar.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Vencer al invicto rival,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Sufrir el dolor insufrible,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Morir por un noble ideal.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Saber enmendar el error, 잘못을 고칠 줄 알며,
Amar con pureza y bondad.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Querer, en un sueño imposible, 불가능한 꿈 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Con fe, una estrella alcanzar.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 <맨 오브 라만차> 'Impossible Dream'(이룰 수 없는 꿈) 중
노파의 행적은 상세히 소개되지 않았지만, 금복의 행적은 무척 자세하고 경이롭다. 금복이 집을 떠나는 장면부터 그녀의 삶에 두려움과 불가능은 없다. 천연덕스럽게 부모의 부재를 거짓으로 말하고 생선장수의 트럭에 오른 것도, 어촌에서 생선장수와 함께 살며 건어물 사업으로 크게 부를 쌓는 모습도 금복을 완벽하고 강인한 여성으로 묘사한다.
이후 걱정을 따라 생선장수와 쌓은 모든 인연과 부를 버리고 망설임 없이 떠나는 모습에서는 순수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 칼자국의 여인이 되어 현실이 아닌 이상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벽돌을 만들어 사업에 대한 확신과 거침없이 성공을 이뤄내는 모습에서는 이미 그녀의 삶은 닿을 수 없는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존재로 만든다.
완벽해 보이는 금복의 모습이 기행과 결핍의 산물로 보이는 것은 자녀인 춘희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모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엽기적이며 사이코패스적인 모습이다. 금복은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자식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타자화한다. 모성과 돌봄은 없다. 버려지는 것보다 더 지독한 방기가 춘희를 대하는 금복의 태도다. 작품은 결국 금복이라는 복잡하면서도 '부조리한 인생의 탐구'의 여정을 드러낸다.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p.310)
그런 금복도 마지막 순간에서는 자신의 상실과 결핍을 인정한다. 그러나 상실과 겹핍의 감정은 오로지 자신을 향한 마음이다. 죽음을 맞는 순간 본능처럼 자신의 딸을 떠올린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단 한번도 하나뿐인 자식, 춘희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없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춘희는 '무(無)'로 혼자만의 세상에 남겨진다.
등을 밀어주는 동안, 금복은 마침내 자신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끝없이 상실해 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한 셈이었다. 유년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첫사랑을 상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젊음을 상실해 버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빈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싱그러운 수련의 육체 앞에서 뼈저리게 확인해야 했다.(p.264)
춘희의 삶은 안타까움 이상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엄마로부터 버려지고 찢긴 삶, 교도소에서는 학대와 고문을 받고 이후엔 하염없이 외로운 기다림의 시간이다. 마치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걸린 거대한 바위 같다.
교도소에서의 모진 시간 이후, 폐허가 된 벽돌 공장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 만났던 트럭 운전사에게 육체적 농락을 당하면서도 춘희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트럭 운전사의 딸을 낳았지만 살아내는 방법을 모르는 모성은 딸을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춘희는 엄마 금복이 자신에게 행했던 것처럼 자신의 딸을 방기 하지는 않는다. 모성은 본능이라는 믿음을 춘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춘희라는 캐릭터는 작가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한다. '큰 육체 안에 가려진 영적이고 신비로운 인물, 비극적이지만 악하지 않은' 춘희를 통해 작가는 '모순된 비극성'을 구현한다.
춘희에게 아버지의 세계는 없다. 벽돌 장인인 文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했다고 하지만, 그는 벽돌을 굽는 장인의 삶으로 막연하게 이끌었을 뿐이다. 작품은 여성의 서사지만 상당히 폭력적이다.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단지 젠더로서의 여성뿐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뒤편에 존재했던 마이너리티를 대표'하는 여성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성의 서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영화 <길복순>과 드라마 <퀸 메이커>에서 주도적이고 완벽한 여성들이 자신만의 삶을 완성하며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길복순>과 <퀸 메이커>에서는 마이너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영리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고래>에서는 금복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 순간에도 여전히 마이너의 위치에 존재하는 여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금복이 시대를 뛰어넘는 입지전적 인물임에도 시간적, 시대적 배경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성을 뛰어넘는 수완과 능력을 가졌지만 결국 그 시대의 여성에 대한 사회구조적 불평등의 인식과 이해를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며 느꼈던 불편했던 감정의 정체도 그 부분인 것 같다. 질펀한 사투리나 파괴적 언어도, 토속적 표현과 성적 욕망도 결국은 남성의 성폭력과 편견의 피해자이자 객체로 기능하고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순이지만 여성 서사가 아닌 여성 서사 같다.
여성(금복이나 춘희)의 위치가 마이너가 아닌, 불편하고 억지스럽지 않은 다만 인간으로서의 서사를 그리는 것은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한 것만큼 어려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