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May 14. 2023

엄마를 떠나보내는 시간, 그 태도에 대하여

강진아, <오늘의 엄마>

엄마가 떠나고 7년이 지난 지금도 때때로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고 목소리가 들린다. 꾸부정하게 쪼그려 앉은 등 뒤로 들리는 힘겹게 다정한 목소리, 욕실에서 손빨래를 하는 모습과 나갔다 들어올 때 현관에서 반기는 표정 등. 기억의 조작으로 인한 각색이 있겠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를 환대하고 나는 비교적 차갑다.


이런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나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확인하며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진저리를 친다. 아마도 엄마는 나의 이런 성격을 알았을 것이다.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감싸고 덮고 좋은 면을 펼쳐 남들에게 자랑했지만 말이다.


상실의 시간     


강진아 작가의 <오늘의 엄마>에 두 딸이 나온다. 엄마와 동생에게 지극한 맏딸 정미와 자신의 일만으로도 버거운, 그러나 마음은 여린 딸 정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칭하는 정아의 고백을 대하며 나 또한 조목조목 나의 이기심을 되짚어 확인했던 것 같다. 책의 말미, 엄마는 임종 직전에도 정아가 자신의 이기심을 자책할까 봐 유언처럼 당신의 마음을 전한다. 너는 착한 딸이라고.


<오늘의 엄마>는 남자친구를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정아가 사랑하는 엄마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과정에서 느낀 자아 성찰 고백이다. 너무도 소중했던 상실과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이기적인 실체를 감출 수 없었다고 정아는 말한다. 엄마의 참혹한 병상에서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자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을 연민하기에 급급하다.


여기에 조금 더 있고 싶다. 죽은 남자 친구도 없고 아픈 엄마도 없어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는 곳.


책은 정아의 상실의 시간을 기록하며 엄마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정아의 시각에서 보는 죽음은 단정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나에게도 엄마의 병상과 임종의 시간이 있었다. 단정함이 허락되지 않는 죽음의 시간은 슬픔을 밀어낸다.


정아의 말대로 없던 병이 생겨서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낯선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보고 만지고 사물처럼 옮겨지고 전달되며 사람은 질병 자체가 된다. 앞에서 옆에서 혹은 문 뒤에서 나누는 대화는 망나니의 칼부림과 다르지 않다. 날카롭다 못해 섬뜩한 말은 환자의 마음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모진 시간들을 서로 견디며 정아는 엄마의 임종을 맞았다.


화가 나고 무기력하고 서글펐던 시간들이 책을 읽으며 복기되는 것 같았다. 상황을 통제할 수도 없고 무어라 진단할 수도 없었던 그때의 마음 상태를 정아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달까. 아픈 엄마가 아닌 나를 연민하는 이기심은 자식이라서 가능한 특권 같다.


부모의 입장은 다른 것 같다. 정아, 정미의 엄마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이상하네' 정도로 알고 있는 엄마의 상태는 사진만으로도 심각한 정도의 폐암에 허리와 목뼈에도 종양이 보인다. 전이의 정도가 상당하겠지만 자세한 것은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한다는 의사의 얘기를 엄마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자매는 의논한다.


"더 알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정아와 "엄마가 애는 아니잖아"라고 굳은 얼굴로 답하는 정미. 쉰다섯의 엄마의 증상을 스물아홉의 보호자가 본인은 알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인다. 이미 엄마의 입장으로 마음이 기울었기 때문이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병을 당사자는 몰라도 된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할까. 감춘다고 해서 본인이 모를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하여  


얼마 전 지인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애도를 표하려고 고인의 배우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물으니 알츠하이머 초기라며 집에 계신다고 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남편의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며 나름 어머니를 배려한 결정임을 강조했다. 남은 장례 일정과 앞으로의 시간에서 고인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하려고 저러나 싶어 마음으로 오지랖을 펼쳤다.


만약에 우리에게 같은 상황이 벌어졌고 자식들이 부고를 알리지 않고 저들끼리 장례를 치른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별한 병증이 있다고 해도 최대한 마음을 써서 알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거기까지가 자식의 배려고 이후의 선택은 남은 배우자의 몫이 아닐까.


3-4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던 정아의 엄마는 6개월을 더 살며 기적 같은 삶을 보여준다. 자연치료와 병원치료를 병행했지만 투병의 원칙은 환자의 선택이 우선이다. 엄마는 눈앞의 무수한 문제 중에서 삶의 질을 고려한 선택을 스스로 한다. 인간다운 삶,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을 하면 자매는 긍정하고 따르는 방식이다.


목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삶의 질을 위한 수술과 몸의 마비를 막고 스스로 화장실을 오가는 정도의 삶의 질을 위한 항암 치료. 여러 선택지를 정미가 제시하고 엄마의 결정과 남은 사람의 동의가 빠르게 이어진다. 상대의 입장에서 안내하고 기다리고 존중하는 모습에서 후회 없는 마지막을 보내는 지혜가 느껴진다.


정아의 마음과 정아 엄마의 마음을 오가며 하나는 분명해졌다. 우선 엄마의 자식으로 살며 이기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더는 자책하지 말자고. 아무리 포장해도 그건 나를 위한 연민일 테니까. 그러니 이제는 엄마와의 시간을 긍정으로 돌리는 선택을 해보자.


간병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을 때, 그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가족 중 누군가 세상을 떠나는 경험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겪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죠. 단절된 시간이 개인의 몫으로만 남는 것 같아요. 한 세계와 이별하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시기인데 말이에요. 상실을 온몸으로 견디는 주인공 정아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긍정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월간 채널예스, 작가와의 인터뷰 중)


또 하나, 노인은 아니고 젊지도 않은 경계가 애매한 나이지만 때때로 죽음을 생각한다. 늘 답을 모르는 숙제처럼 깜깜했고 여전히 그렇다. 다만 정아 가족의 이별과 정아 엄마의 마지막을 통해 너무 멀리 시선을 둘 것 없다는 생각을 한다. 다가오는 갈림길에서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는 가운데 혹 가족끼리 너무 다정하지 못해도 다 괜찮을 것 같다.


동정은 정말 쉽고도 이기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다정한 사람들은 다정함을 거두는 방식으로 서로를 등지지만, 다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오지 마라', '안 보고 살 거다'라는 말로도 서로를 밀어낼 수 없음을. (최진영, 소설가)




매거진의 이전글 홀딩, 턴... 이런 이혼이라면 나쁘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