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된 자유
- 론 폴
나는 오랫동안 진리에 대해 생각해왔고 그 진리가 곧 자유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 이유는, 진리란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며 나에게는 자유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자유란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더 인간답게 살도록 만드는 필수 장치이다.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리이며 인간을 사유하게 만들기에 자유가 없는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라 불려질 수가 없다.
감시나 통제에 개의치않고 생각없이 시키는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더 편한 사람들도 많다. 지배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겐 그런 삶에서 안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에게 자유의 필요성과 소중함을 말한들 알아먹을리 만무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들때문에 인간다운 인간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도 안타깝다. 인간이라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박탈하고자 하는 대상과 싸움을 불사할 의지도 가져야 한다. 풍전등화같은 한국에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좋은 문구 발췌>
자유는 다른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지 않는 한, 개인이 고르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가 공격당할 때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공격당하게 된다. 심지어 특정한 정부를 세우는 목적이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일지라도, 바로 그 정부의 본성이 자유와 스스로 정말 지독하게 경쟁하도록 만든다.
인간의 진정한 존재 이유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 그 진리와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본인은 믿는다.
본인은 인간의 근본이 자유라면, 가장 자연스러운 이 본성을 극도로 살릴 때 인간 최고의 것이 흘러 나오고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결과적으로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되리라 확신한다.
비극적이지만 정부는 성장 산업이다. 우리의 사적인 삶과 재정적 관심은 선거 참여를 유도하는데, 이것이 정부의 크기를 비대하게 만들고 비대해진 정부가 다시 우리의 삶과 경제에 마음대로 침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음란함이다.
저항이 비폭력적이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현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나는 이들의 활동을 존경한다. 어떤 전략을 취하든 그것은 절대적으로 개인 선택이다. 시민 불복종의 가장 큰 장점은 홍보 효과이다.
내가 볼 때 전쟁에 대해서 올바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경제에 대해서 틀리는 일반적 경향이 있고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해서 옳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서 틀리는 동일한 경향이 있다.
만약에 우리가 평화와 자유에 관한 일관적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주의와 전쟁 모두를 반대할 것이며 온갖 형태의 국가 통제 주의에 대항해 국내 문제든지 국제 문제든지 기꺼이 싸울 것이다.
정치가든 박식한 언론인이든 똑같이 정치는 선동가들을 낳는다. "선동가Demagogue"라는 단어의 유래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데 이유는 이 현상이 그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선입견, 감정, 두려움 그리고 공공의 기대에 호소해서 영향력이나 정치권력을 찾는 것이 선동이다. 선동가는 계몽하지 않고 위협하고 미사여구로 말장난을 한다.
선동은 자유의 적이고 정치 성향을 망라해서 권력에 목마른 자들의 이익을 돕는다. 정부는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즐기고 보통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돌봐야 한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오로지 선동가들만 우리를 통치할 사람을 정할 "지혜'를 제공해줄 수 있다. 정치 행동의 목표가 더 이상 자유를 방어하려는 것이 아니면 선동이라는 말 이외에는 비열한 정치의 본성을 설명할 수 없다.
다수결은 정치인들이 그들이 하는 일을 덮어줄지 모르나 이러한 표결에는 어느 개인의 생명과 자유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에 어떠한 도덕적 권위도 없다. 이는 피지배자의 민주적 투표를 통한 동의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개인의 행동을 원하는 틀에 넣거나 경제적 교류를 감독하거나 "민주주의를 위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려고" 우리 군대를 이용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어느 누가 지구 온난화가 실제라고 믿는 것과 상관없이, 공적 수당을 받는 관료들과 과학자들로 구성된 세계적 단체에 전 지구적 기후 조작을 시도하는 권한이 주어질 때, 20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 동안 분별이 불가능한 효과를 가진 작동할 듯한 계획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을지 심각하게 의심하게 된다. 나는 정부 계획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아왔다. 정부의 계획들은 한 선거 주기 이상 지속되도록 계획되지 않았다. 정부가 수십 년간의 기후 양상을 기획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불합리한 수준의 충격이다.
두려움을 쌓고 사람들이 정부에 구원을 요청하도록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급진 환경 운동가들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PC는 결코 모욕당하거나 비방 받을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존엄성을 보호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냉소주의, 정치적인 점수 얻기, 또는 잘못된 발언에 대해서 도전자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PC를 주도한다. 좀 더 그럴듯하게, 열등감이 그들을 이끌며 그들은 무감각한 언어의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이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도덕적 분노의 가면을 쓰고 스스로 증명하려고 한다. 이 전체 과정은 권위주의 사회를 반영한다.
인종 차별주의자는 어떤 집단의 특성이 항상 모든 개인의 특성을 능가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첫 번째 오류이며, 편리함이나 빠른 사고를 위해 집단 이질성의 현실을 단순화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벤 프랭클린은 우리에게 200년 전에 이 점을 경고했다. 자주 인용되는 그의 경고는 현대 미국에서 완전히 무시된 것 같다. 간결하게 말해서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조금 일시적인 안전을 얻기 위해 본질적인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유와 안전 어느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