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실력, 장자
- 최진석
<좋은 문구 발췌>
왜 혁명이 혁명으로 완수되지 않는가, 왜 민주화를 주장하면서도 표현의 자유를 막는가. 함석헌 선생의 말을 이용하여 말하면, 혁명가가 스스로는 혁명하지 않은 채 혁명한다고 나서기 때문이고, 민주화 운동가가 스스로는 민주적 감수성도 없이 민주화한다고 설치기 때문이다.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 ‘덕'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다. 〈인간세> 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잘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잘 다스려지지 않은 나라로 가라. 의사 집에 환자가 모이는 것이다." 이것은 안회가 기억하는 스승 공자의 말이다.
장자는 <대종사> 편 안에서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 참된 지식이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참된 지식은 그 사람이 참된 사람이어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제자백가 가운데 유일하게 정치 철학의 요소도 지니고 있으면서, 정치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높이까지 도달한 단 한 사람이 장자입니다.
도가 철학을 잘못 읽고 《장자》를 잘못 읽으면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긴다고 하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열심히도 안 하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흥청망청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자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넓고 깊은 학문을 이룬 사람입니 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서, 장자는 가식적인 명예와 가식적인 평가가 난무하는 곳에 나를 두지 않고, 차라리 자신만의 내면적 독립성, 자발성에 의존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덕경》 제8장은 '상선약수‘로 시작합니다. '선'에는 '착하다'라는 의미보다는 탁월하다, 훌륭하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가장 탁월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수선리만물이부쟁’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물은 만물을 아주 이롭게 해 주지만 다른 것들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장자가 세상은 한순간도 변하지 않을 때가 없는데, 사람은 쉽게 정해진 마음에 갇힌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30년, 40년 굳어 있으면 세상의 변화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오에서 이탈하라, 그러면 너는 욕을 뒈지게 먹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우리는 흔히 무소유라고 하면 재산을 갖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무소유는 이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재산을 갖는 것, 혹은 안 갖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를 내 뜻대로 정해서 관계하려는 소유적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죠.
음악은 문자가 아니라 소리를 어루만진 결과입니다. 문자는 인간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소리는 신적인 차원의 것이죠. 소리는 문화적 활동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지만, 문자는 문화적 활동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소리의 세계에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은 문자의 세계에서 쾌락을 얻는 그것보다 높은 수준의 영혼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입니다.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 그것을 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수양하는 이유는 옳은 것이더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이 세계에 있는 것이나,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진실일 수도 있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말해줄 수 없소. 공간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 한철 사는 벌레에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소.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오. 자잘한 선비에게는 도를 말해줄 수 없소. 교육받은 내용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오.
자신의 부족함이나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가장 큰 앎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절대 망가지지 않습니다.
과학을 모르는 철학은 답답하고 숨막힙니다.
도덕이나 가치보다는 사실 우선입니다.
장자는 가치보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작은 사람은 신경질이 많습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뜻이 커버리면 작은 일들에 쉽게 좌우되지 않고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득도한 사람은 가득 차고 텅 비는 것을 자세히 살펴서 그것들이 서로 위치를 달리하며 교대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거나, 잃었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얻음과 잃음 사이의 한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선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 선이 그 사람만의 선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선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의 내면은 스스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자신의 선만을 선으로 알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에 조금이라도 안 맞는 것은 쉽게 악으로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노자가 말하는 화광동진과 비슷하겠습니다. 즉 자기가 내는 빛을 조화롭게 만들고, 성숙시키고, 잘 단련시켜서 세상 보통의 일들과 잘 어우러진다는 뜻입니다.
《도덕경》에는 화광동진에 이어서 광이불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빛이 나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내는 빛을 세상과 조화되도록 성숙시켜서 속세와 어깃장을 내지 않고 함께 한다는 말이죠.
덕이 신실해지지 않으면 궁금증이 들지 않아서 세계(사실)를 궁금해할 줄 모르게 되어, 결국은 정해진 가치에 빠지는 쉬운 길을 택함으로써, 얇고 딱딱한 도덕주의자로 전락해버립니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말합니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 까?" 우리는 보통 우리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을 살기보다는 이미 좋다고 정해진 것을 수행하는 것으로 삶을 채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자도 《도덕경》 제2장에서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한 것으로 알고 살면 선하지 않은 것이고,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추종하면 오히려 추한 꼴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사실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살 것인지, 고유한 나로 살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관리를 촘촘하게 강화하는 이유는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를 절대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실에 근거하는 통치보다는 도덕에 집중하는 통치를 하게 되죠.
장자의 견해는 그런 자잘한 승리는 안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자잘한 승리가 벌어지는 그런 환경 자체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로도 읽힙 니다. 자잘한 승리를 도모하거나, 자잘한 승리에 취하면 사람이 자잘 해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과정에서는 앎의 결과인 지식을 흡수하는 데에 집중하는 일보다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지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무리 아는 것 이 많다 하더라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줄여버리면 영혼의 율동감이나 윤기는 사라집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도덕경》의 공성이불거는 풀이하자면 '공이 이루어지면 그 공을 차고 눌러앉지 않는다'입니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한테 가장 큰 적은 성공의 기억입니다.
유명해지는 일을 부정할 정도가 되려면, 먼저 유명해질 건더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유명해질 건더기도 갖지 않은 사람이 유명해지기 싫다고 말하는 것은 함부로 대충 살다 가겠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