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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by Norah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 버트런드 러셀





<좋은 문구 발췌>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워왔다. 오랫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이 말을 뒷받침할 증거를 부단히 찾아봤지만 (•.) 운이 없었는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세 계가 더 광기에 빠져드는 것을 목격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자신의 시대를 묘사한 말이다.


의심하는 일은 늘 가치가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의심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런 의심은 가치가 없다.


러셀은 친절히 말한다. '교조주의자가 해롭다'면 '회의주의자는 쓸모가 없다'고. 경험론은 '교조주의와 회의주의 사이'에 있다고. 철학이야말로 이런 사유를 훈련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해 다양한 것을 향유하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희망과 모험, 변화가 필요하다. 홉스가 말했듯이 "행복은 현재의 성공에 있는 것이지 과거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자유주의의 실천적 신조는 나도 살고 너도 살게 하는 것이고, 공공질서가 허용하는 내에서 관용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정치 제도에서 중용을 지키고 광신을 피하는 것이다.


스콜라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같은 경험적 기반 없는 교조주의 체제는 추종자들 간에 매우 강한 사회적 결속력을 이끌어낸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귀중한 구성원들을 박해한다는 단점도 있다.


가장 기이한 것은 헤겔이 칼 마르크스에게 끼친 영향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가장 공상적인 신조 중 일부, 특히 역사가 논리적 계획에 따라 발전한다는 믿음과, 순수하게 추상적인 변증법처럼 자기모순을 피하는 방법을 찾는 데 관심이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과학 지식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올바른 태도를 보여주 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교조주의는 아는 것을 확신하고, 회의주의는 모르는 것을 확신한다. 철학이 해소해야 할 것은 지식이나 무지에 대한 확실성이다.


철학은 사고 대상을 확장함으로써 현재 느끼는 불안과 고통을 해독해 주고, 고통스럽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예민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최대한 평온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중요한 작업을 할 때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어느 정도는 고립되어야 한다. 동시대 대중의 찬사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신학적 믿음이 쇠퇴해서가 아니라 고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정복하는 것은 지혜의 출발점이다. 이는 진리 추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노력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을 피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재난을 당할 리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용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후자는 어렵고, 어느 시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를 지속하기 위해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할 가치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관용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문명화 되려면 정서적 측면에서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와 매우 유사한 확장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명화된 사람은 칭찬할 수 없는 경우를 마주할 때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하는 것 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다는 인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악의 근원을 발견하고 제거하려고 한다.


앞으로 인류가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해악은 어리석음이나 악의, 또는 둘 다를 통해 서로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잘못된 신념의 가장 강력한 근원 중 하나는 질투이다.


인간이 인간에 게 가한 가장 큰 해악의 대부분은 거짓인 믿음을 확신하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진다. 진실을 아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 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진실이 자신들만의 전유물이라고 믿어서 무자비한 결단력으로 행동하면 재앙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자는 다수가 항상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그가 믿어야 하는 것은 현명하든 그렇지 않든 다수결에 따른 결정은 다수가 다른 결정을 내릴 때까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평범한 사람의 지혜라는 신비로운 개념이 아니라, 자의적인 힘의 통치 대신 법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실용적 도구로 믿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자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항상 어디서나 최선의 체제라고 믿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조직이다. 즉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정치 조직, 사람들이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 게 하는 경제 조직(특히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가들에서), 건전한 국제주의를 형성하는 교육 조직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특정한 도덕적 자질이다. 이는 오랫동안 도덕주의자들이 주장해 왔지만 지금까지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중 가장 필요한 자질인 자비와 관용은 갖가지 과격한 주의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광적인 신념이 아니다.


나는 조직과 도덕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둘 중 하나를 성취하면 다른 하나도 곧 성취할 것이다.


지금은 도덕적 결함이 명확한 사고의 길을 막고, 혼란스러운 사고는 도덕적 결함을 키우고 있다. 아마도 내가 감히 바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수소폭탄이 인류를 정신 차리게 하고 관용으로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적 생활에서건 공공 생활에서건, 아니면 진리 탐구에서건 내가 가장 잊지 못할 정도로 감명을 받은 것은 특정한 부류의 자질, 즉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태도였다.


최고의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의 경우에는 위대한 지성과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함이 결합됨으로써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함은 영민함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세속적인 유불리를 고려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내가 만난 과학자들 중에 이러한 자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과학자는 아인슈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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