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온유, <경우 없는 세계>, 창비
* 책을 소개하거나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정보성 리뷰가 아닌, 책을 읽고 떠오른 마음을 자유롭게 쓴 에세이입니다. 스포일러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책의 내용을 일부 담고 있습니다. 때로는 엉뚱한 부분에 꽂혀 책의 내용과 동떨어져 보일수도 있습니다.
학부 3학년, 사회복지 현장 실습을 나갔을 때였다. 실습생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나를 두 개의 단어로 소개했다. 오래된 일이라 한 단어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한 단어는 또렷이 기억난다. '안내자'
청소년기를 지나며 나는 굉장히 답답했다. 누군가 나에게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면, 내 삶에도 멘토가 있었으면, 믿고 의지하고 터놓고 이야기할 어른이 있었으면. 청소년기 내내 주변 어른들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혼자 컸다고, 나도 나를 이끌어줄 진짜 어른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던 나는 명목상 성인이 된 20대 초반에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어른이 되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그래서 불안하고 힘든 청소년들에게 '안내자'가 되겠다며 나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나의 다짐은 진심이었다. 학부에서 청소년 관련 과목들을 빠짐없이 들었고, 여러 곳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많은 청소년들을 만났다. 교회에서도 청소년부 교사로 봉사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도 당연하게 청소년부서에만 지원을 했고 청소년 부서를 맡았다. 나의 다짐에 걸맞게 20대의 나는 꾸준히 청소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열정적으로 그들의 '안내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러나 30대가 된 지금,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꿈이었음을 안다. 내가 뭐라고 감히 누군가의 '안내자'가 될 수 있겠나. 해가 지날수록 누군가의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용기는 점점 사라진다. 내 편인 어른, 나에게 도움이 되는 어른이 주변에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사실 수많은 어른들이 나의 방패가 되고 가드라인이 되어 주었기에 내가 지금의 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어른'이라는 단어가 복잡하고 어렵다. 물리적인 나이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어른이라고 불려 마땅한데, 과연 내면도 어른인가. 타인과의 관계 특히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영유아, 어린이, 청소년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경우 없는 세계>의 주인공은 가출 청소년, 길거리 청소년, 학교 밖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흔히 '청소년'하면 떠올리는 정석의 이미지와는 다른, 그런 청소년들이다. 주인공 인수는 동네에서 사기를 치는 가출 청소년 이호를 만나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를 보며, 그와 함께 지내며 가출을 했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이 떠오른다. 가출을 한 뒤 만난 성연과 경우. 두 친구를 바라보는 인수의 눈은 내가 가진 '청소년'과 '가출 청소년' 혹은 '길거리 청소년'에 대한 편견을 깨닫게 한다.
가출을 한 인수가 가장 처음 만나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 성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출 청소년'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평소 소심하고 가만가만한 성격의 인수는 성연과 함께 어울리며 가출 청소년들 사이에서 "저절로 어깨가 펴지고 가슴이 뿌듯해(p.47-48)"지는 경험을 한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성연의 가정은 당연히 "전쟁터 같은 분위기일 거라 짐작(p.137)"했지만, 따듯한 성연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만나고 가족과 함께 있는 성연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기분(p.137)"을 느낀다.
반면 경우는 어른들의 눈에 '청소년'의 정석이다. 어느 곳에서든 어른들은 당연히 경우를 학교 안 청소년, 가정 안 청소년으로 생각하며 대한다. 그의 행색과 말투와 표정, 행동에서 그가 가출 청소년, 학교 밖 청소년 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경우에게 수능에 대한 이야기, 학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수의 눈을 통해 보이는 성연과 경우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가정 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구김살 없이 청소년의 정석으로 자랄 것이고 전쟁 같은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학교 밖 청소년이 될 것이라는 편견을 정확히 짚어낸다. 청소년들에게 안내자가 되겠다며 수많은 청소년들을 만나고 교제해 온 내가 사실은 그들을 이분법적으로, 원인-결과 프레임으로 바라보았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전쟁터 같은 가정이 심긴 곳에서 성연의 모습을 한 청소년이 나와야 하고 사랑과 보호가 있는 가정이 심긴 곳에서 경우의 모습을 한 청소년이 나와야 한다는 보편적인 믿음과는 달리, 성연의 엄마는 성연의 손을 잡고 제발 집으로 들어오라고 애원하는 엄마이고, 경우의 엄마는 경우를 보고 "너무 놀라서 귀신을 본 것처럼 경악하는(p.225)" 엄마다.
그리고 '청소년'을 이런 잘못된 믿음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나와 같은 어른이 바로 소설 속 청소년들이 말하는 어른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을 어른,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어른, 우리를 더욱 비난할 어른, 우리를 더욱 억울하게 만들 어른. 그래서 더욱 우리를 고립시키는 어른.
사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을 때는 약간의 반발심이 들었다. "뭐 이렇게 나쁜 어른들만 묘사해 놓은 거야? 생각해 보면 청소년들을 위하는 좋은 어른들도 많을 텐데." "하긴, 청소년기에는 모든 어른이 이렇게 나쁘게 보이겠지." 그렇게 '어른'의 입장에서 읽기 시작한 나는,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 후반부로 갈수록 더 이상 '어른'일 수 없었다. 본분을 망각하고 소설 속 여러 청소년들 사이를 떠돌다가 결국 유체이탈한 것처럼 '나라는 어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어른일까. 편견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생활을 추궁하며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어른은 아닐까?
백온유 작가의 소설 <경우 없는 세계>는 가뜩이나 쉽지 않은 '어른'이라는 단어를 더욱 무겁고 더욱 어렵게 만든다. 소설을 읽는 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청소년인 나'가 소환되지만,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건 '어른인 나'다. 20대의 나는 겁 없이 누군가의 삶에 뛰어들어 그를 안내하겠다는 포부로 가득했지만, 30대가 된 지금의 나는 그저 나의 자리에서 '어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정의하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삶이 벅차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렇게 나를 탈탈 털어놓은 백온유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의 말을 통해 다시 그들을 떠올리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주며 부족한 어른인 나를 위로했다.
"내가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애쓸수록 미숙함은 쉽게 들통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길은 여전히 요원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가만히 멈춰서 살필 수 있는 시선을 주었다."(p.277,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