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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delion Dec 28. 2020

천재물리학자의 반전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의 탄생과정에서 야! 너두 천재될수있어!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세상이 그렇듯 세상의 법칙이라고 정의되는 이론들 또한 우리가 아는 이면의 많은 모습들이 존재한다. 천재의 아이콘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둘러싼 시공간과 에너지에 대한 과학적 법칙이다. 상대성이론은 과학의 근간을 이루며 인류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라 칭송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상대성이론으로 알려지기까지, 단지 위대한 과학의 발견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 국경을 초월하는 협력, 군국주의 속에서 맹렬히 싸워야 했던 과학의 국제주의와 평화주의, 법칙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대대적 천문학 관측여정, 정치사회적 교류의 장이 포함된다. 상대성이론에는 아인슈타인만 있는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전쟁"의 저자 매튜 스탠리는 상대성이론의 탄생에 대한 배경과 그 이면의 에피소드를 알기쉽고 흥미진진하게 펼쳐나간다.




처음에는 누구나 천재의 아이콘인 아인슈타인에 대해 갖을 수 있는 의구심이 나도 있었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해결되었고, 나중에는 웬지모를 역시나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그가 정말 천재이기에 가능했던 걸까? 천재는 타고나는 걸까? 천재도 노력이란걸 했을까?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한가지 이론이 정립되기까지

아인슈타인은 타고난 천재였다?

상대성이론은 실험이나 수학적 계산이 아닌 우주의 존재에 대한 추론, 즉 과학적 "감각"에서 시작됬다. 어떻게 한사람의 머릿속에서 위대한 자연법칙이 감각적으로 떠오를수 있었을까? 아인슈타인은 정녕 천재였던걸까?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시대에는 지적 교육의 폭이 넓었으며, 인문학이 기술적 전문 지식의 기반이 되어야한다고 믿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부터 지시받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고전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 수업보다는 집에서 대중을 위한 과학책과 수학책을 즐겨 읽었다. 또한 그는 인문학과 철학책 읽는 것을 즐겼으며, <뉴턴>, <칸트>를 읽고 친구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오늘날의 전문 분야의 전문인을 배출하고자 고등교육부터 이과와 문과를 나누는 우리나라 교육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 시절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폭넓은 분야를 바탕으로 지식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는 단짝친구들과 물리학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수업을 빼먹을 지언정 학교성적은 좋았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독서의 넓은 폭은 훗날 상대성이론이 탄생하기까지 모든 과정으로 연결된다.


아인슈타인은 데이비드 흄의 고전을 읽으며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는 비판적 사고를 길렀다. 그는 또한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겸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의 과학적 개념은 측정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실증주의"연구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과 실제 관측되는 현상과의 괴리를 없애도록 하는 사고방식을 갖도록 했다.


그는 특히 유클리드의 기하학 고전 "원론(Elements)"을 읽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이 정립되는 방식과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크게 인상을 받았다. 이는 그가 자연계를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이 지식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기에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길 희망했고 이론물리학자의 길을 걷는 것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론 물리학은 자연 세계를 형성하는 패턴을 수학적 공식으로 도출하고, 중력과 관성과 같은 명쾌한 개념 몇 개를 이용하여 다양한 물리세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만질수 없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했다.


아인슈타인에게도 취업은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었다.

그는 졸업 후 여러번의 물리학 분야에 직업얻기를 실패하고 스위스 베른의 특허사무소에서 3급 기술 심사관으로 일했다. 이는 순전히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인슈타인은 훗날 복잡한 특허 신청서에서 간단한 핵심을 뽑아내는 일이 과학 문제에 대한 그의 독특한 접근법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독서에 푹빠져 일생을 살아간다. 상대성이론의 근간은 아인슈타인의 독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의 폭넓은 독서가 과학과 수학공식, 천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세상(우주)의 법칙인 상대성이론이 탄생하게끔 만들었다. 실제로 상대론은 실험이나 수학적 계산이 아닌 우주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지에 대한 감각, 측 철학에서 시작 됬다. 그가 전기장과 자기장 형성의 비대칭적 상황에 대한 비대칭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전자기학적 현상을 어떻게 측정할것인가"라는 마흐식 질문과 "전자기 유도에 대한 실제적 경험은 무엇인가"라는 흄식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책상에 앉아 우주의 본질을 차근차근 추론하는 최고의 이성적인 천재는 타고난 것이 아닌 바탕에 수많은 독서를 통한 넓은 분야의 지식과 통섭에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독서를 통해 지식의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상대성이론이란?

상대성이론이 탄생하는 시대적 배경에는 이미 2세기전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는 뉴턴의 중력이론이 있었다. 뉴턴의 이론은 20세기 초에 알려져 있던 모든 것의 밑바탕을 이뤘으며 당시의 과학은 모두 뉴턴의 체계를 따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대성이론은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과 공간이 통합된 시공간이 관측자의 운동에 따라 시간의 흐름, 공간적 측정이 달라진다(시간 지연과 길이 수축 발생)는 법칙이다. 이러한 법칙 또한 정립되고 사람들에게 수용되어 널리 알려지기까지 많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전쟁을 거쳐 탄생되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상대성이론이 성공적으로 발표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상대성 이론의 정립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시간, 공간, 질량의)측정값은 변할 수 있고, 움직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움직임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시간, 공간, 질량 자체도 상대적인 것이었다. 이는 뉴턴의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는 설명이었다. 

우리는 중력을 어떻게 느끼는가? 중력은 질량에 비례하므로 두 관찰자는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중력을 다르게 경험할것인데, 그렇다면 중력이 상대적이고 바뀔 수 있을까?

상대성이론을 있게 만든 중력에 대한 질문, <아인슈타인의 전쟁>



등가원리: 중력과 가속도는 구별할 수 없음

만약 박스안에서 추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상황에서, 추가 빠른속도로 바닥에 떨어지는 현상이 지구(행성)의 중력 때문인지, 우주속에서 바닥의 로켓의 점화로 인한 가속도 때문인지 관측자는 구분할 수 없다(등가원리, 중력=가속도). 


이 등가원리는 "중력"이라는 문제를 풀게함과 동시에 특수상대성이론(물체가 정지해있거나 일정하게 움직이는 상황에서만 적용)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가속도"라는 문제를 도마위에 올려놓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등가원리를 확인(관측)할 수 있는 세가지의 실험


가속이 빛을 휘게 만든다면, 중력에 의한 빛의 휨도 관측가능함(등가원리)

첫째, 중력에 의한 빛의 휨 현상

만약 아까와 같은 바닥에 로켓을 부착한 박스 한쪽에서 손전등으로 빛을 비춘다면 빛이 위쪽으로 가속되는 박스를 가로지르는 사이 바닥은 위쪽으로 빛줄기는 원래높이보다 낮은 반대편 벽에 도달한다. 결과적으로 가속때문에 빛이 휘어지는 현상이 관찰된다. 등가원리에 의해 가속이 빛을 휘게 만든다면 중력도 빛을 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태양의 중력으로 별에서 나온 빛이 원래위치에서 0.83초(1초=1도*1/3600) 약간 벗어난 곳에서 보이는 휘어짐이 관측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두번째, 중력이 빛은 원래보다 붉게 보이게 만드는 중력 적색편이

가속되는 원천에서 나오는 빛의 왜곡현상으로 인한 시간지연이다. 빛의 색깔은 전자기 파동의 진동 주파수에 의해 결정되는데, 시간지연은 이 진동을 느리게 만들 것이고 이는 우리눈에 본래보다 더 붉은 빛으로 감지 될 것이다. 


셋째, 수성궤도의 미세한 흔들림을 나타내는 근일점의 세차 운동

뉴턴의 법칙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행성운동에 적용되어져 왔고 거의 모든 오차가 해명되었지만 수성의 미세한 흔들림은 쉽게 설명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수성궤도 안에 존재하는 "벌컨"이라는 행성의 중력이 작용한 결과라고 추측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그 자체만으로는 훌륭했으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실험적 근거를 필요로 했다. 이 중 가장 측정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첫번째인 개기일식 때 천문학자들에 의해 측정 가능한 빛의 휨현상이었다.




빛의 휨을 측정하기위한 천문학 원정

당시 개기 일식의 관측은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드는 원정대를 조직하여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관측을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했다. 개기일식에 필요한 장비는 무겁고 정교해서 손상당하기 쉬웠고, 장비를 운반하고 설치 및 측정할 수 있는 인력과 여건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위해선 국립 천문학회 정도의 재무적 정치적 규모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의 무대에서 독일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고 상대성 이론의 천문학적 증거를 관측해줄 천문학자와 접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상대성이론의 실체

일차세계대전의 한가운데 탄생한 국제주의의 승리

당시 상대성이론에 대한 가치는 1) 과학, 2) 이론의 정치 사회적 의의이다.


세계대전이라는 무대 위 군국주의가 만연한 시절 과학의 국제주의는 당시 많은 정치적 압력과 핍박을 각오해야 했다. 이러한 시절 그럼에도불구하고 과학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는 전쟁, 정치와 관련없는 "중립적 자세"를 취해야만 하며 과학의 발전을 위한 순수한 과학자로서의 소명의식으로만 과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상대성이론을 발판삼아 독일과 영국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한 과학자의 의도적 연결이 들어있다.



아인슈타인은 종이와 잉크, 끈기있는 사고를 통해 새로운 우주를 창조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문제를 하나 풀면 다른 문제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얼마나 클까? 별들이 서로 밀어내는 수수께끼같은 우주론적 힘이 정말로 존재할까?

아인슈타인의 고군분투, <아인슈타인의 전쟁>

당시 독일은 정치적 교류는 물론 학술적 교류를 포함하는 비정치적 교류도 금지되어있는 실정이었다. 독일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고, 과학적 교류의 장이었던 학술지는 물론 모든 편지와 전보까지 감시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교류가 거의 불가능했다. 독일에서 고립된 아인슈타인은 식량공급이 부족해 영양결핍이 생기고 침대에서만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상대성이론을 어떻게든 발전시키고자 현실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 환경적 제약을 이겨내며 물질과 에너지의 존재가 시공간에서의 곡률을 만들어내고, 곡률은 물질과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일 지 결정한다는 내용과 관련된 방정식(아래)을 발표했다.


커다란 포탄이 막 터졌고 한 무리의 동료들을 날려버렸다. 사람들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폭파되서 없어져 버렸다. 나는 그냥 그자리에 서있었다.
고요했고 안개가 자욱했는데 공기 중에서 그들의 피맛을 느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전쟁의 참혹함 가운데 서서, <아인슈타인의 전쟁>

당시에 전쟁은 너무나도 참혹했고, 당시 독일 과학계는 일심동체로 전쟁을 지지했으며 질소 화학무기를 제조하여 전쟁에 사용하는 등의 만행으로 독일 과학계에대한 신뢰가 떨어져 있었다. 과학은 신뢰에 근거하기에, 독일인의 민족성으로 그들을 믿을 수 없다 생각한 국제 과학계는 독일인을 국제과학계에서 아예 제명해버리는 일이 허다 했다.


에딩턴이 있었던 영국은 독일의 학술적 교류를 차단했고, 그렇기에 더욱 그리 유명하지 않던 독일의 무명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적국인 영국에 알려지기에는 만무했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레이덴 천문대장인 빌럼 드 지터는 영국 해협 너머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요약본을 보냈고 평화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에딩턴의 손에 편지가 들어가게되었다.



협력
에딩턴(왼쪽)과 아인슈타인(오른쪽)

에딩턴은 영국 왕립천문학회의 수석 천문학자이자 상대론의 수학적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었고, 아인슈타인 또한 반프로이센(독일의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임을 알고 상대성이론에 더욱 흥미를 보였다. 


에딩턴은 퀘이커교도로 노예, 전쟁, 사형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영국의 적국인 독일의 무명 과학자의 이론을 실증적 증거를 제시하여 대중화함으로써 과학으로 정치를 넘어선 화해와 협력의 계기를 만들고자 결심하였다.


<상대성이론의 천문학적 증거를 마련하기 위해선 해야할 일>

1) 개기일식의 정확한 시간과 장소의 예측 
2) 날씨와 전쟁의 운적 요소에 대비 
3) 실제 관측장소에 대한 대대적 원정의 준비 
4) 사회/정치적으로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 환경 구축

1), 2), 3)이 성공적으로 끝나 이론이 과학적으로 훌륭함이 증명되더라고 4)가 구축되어있지 않으면 이론의 과학적의미는 물론, 독일과 영국의 사회/정치적 협력의 결과물에 대한 의도가 수포로 돌아가게된다. 따라서 에딩턴은 천문학 관측에 반드시 성공해서 이론에 합당한 결과를 내야 했고, 결과를 사회적으로 알리는데에도 성공해야했다. 



어디서 관측을 할 지 선정하는데에는 많은 요인이 들어갔다. 좋은 날씨가 평판이 난 곳인가? 습도는? 얼마나 낮은 고도에서 일식이 일어나는가? 근처에 천문학자와 중장비를 실어 나를 증기선과 철도가 있는가? 이 교통수단의 운행 일정과 일식 기간이 교차하는가? 근처에 전신국이 있는가? 식량과 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조달할 수 있는가? 원정을 지원해 줄 우호적인 지방정부 혹은 식민지 통치 행정부가 있는가?

일식원정에 고려할 사항들, <아인슈타인의 전쟁>

에딩턴은 어떻게든 성공적인 일식원정으로 이끌기 위해 여러가지 변수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여 지혜롭게 원정을 기획한다. 이 과정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상당히 치밀하고 객관적이며 운의 요소를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관측(결과)값을 낼수 있는 방법이기에 참 감탄했던 부분이다.


1919년 5월 예정된 개기일식에 브자질 내륙의 철도선상에 있는 소브라우(1)와 적도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180km 떨어진 포르투칼 제국의 식민지인 프린시페섬(2)이 적합한 후보였다. 프린시페섬은 코코아 수출로 유명하여 증기선이 운행되었고, 유럽식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바다에 고립되어 있어 안정정인 관측에 유리했다.


에딩턴은 1918년 다이슨으로부터 전시상태임에도 당시 1000파운드(약 90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보조금을 지원받아 두군데에서 모두 일식관측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날씨와 다른 상황에 대비하여 보험을 든 선택이었다. 


이 외에도 원정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에딩턴의 치밀한 계획에는 믿을 수 있는 관측자와 협력자의 선별, 정밀한 측정을 위한 환경적 여건 마련, 망원경의 예비분을 측정에 대동, 대조용 건판(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때와의 별의 위치 측정) 측정,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관측 장소에서의 고유한 대기 특성을 반영한 측정을 바로 시행 등이 포함됬으며, 계속해서 상대성이론의 강의와 책을 써서 사회적으로 이론에 대한 이해도와 수용도를 높이고자 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개기일식(왼쪽)과 이를 측정하는 천문 장비(오른쪽)의 모습



1919년 6월, 드 지터로부터 상대성이론을 알게된 지 3년 후, 드디어 에딩턴은 관측값이 상대성이론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이 결과가 사회/정치적으로 영향을 갖도록 하기 위해 <타임스>에 기사를 내고, BA연례회의에 결과를 발표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런던타임즈(좌측상단), 뉴욕타임즈(좌측하단), 런던뉴스(우측)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발표, <아인슈타인의 전쟁>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적인 독일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평화를 사랑하는 천재로 알려졌고, 상대론은 과학의 국제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과학의 혁명으로 알려졌다. 당시 언론은 "과학이 국가 간 분열을 치유하다"라는 한편의 전쟁 드라마를 썼고, 아인슈타인은 국제적 유명인사가 되었다.



과학자의 자세, 우리의 자세

상대성이론의 탄생과정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전쟁과 협력이 공존한다. 우리가 아는 하나의 법칙에는 수많은 이들의 고군분투와 전쟁을 둘러싼 운적 요소가 담겨 있다. 결코 어느 하나가 없이는 우리가 아는 상대성이론이 이 세상에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상대론의 탄생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 3가지를 얻었다.


첫째, 아인슈타인의 꾸준한 노력과 끈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일어난 4년은 아인슈타인이 가장 논문(59개)을 많이 배출한 시기이기도 하다. 연간 15개, 1달에 약 1.3개의 논문을 쓰고 출판했다. 이는 정말 쉬운게 아니다. 개인의 건강을 헤쳐가며 전시상황에도 그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의 끈기와 과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평생의 폭넓은 독서로인한 끝없는 창의력이 상대론을 한단계 한단계 발전시켰고 지금의 상대론과 천재 아인슈타인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협력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지금의 상대성 이론으로 정립하기까지 많은 학계의 지식인들의 영향과 도움을 받는다. 20세기 당시의 학계에는 교신을 통해 서로의 연구에 대한 논의와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그는 특히 헨드릭 로런츠라는 선배 물리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민코프스키는 중력에 관련된 특수 상대성 이론을 재구성 하였고, 앙리 푸앵카레는 이를 확장시켰다. 아인슈타인은 이들이 정립한 수학공식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또한 그밖의 많은 물리학계, 수학계, 천문학계의 지식인과의 대면적 또는 서면적 지식의 나눔(토론), 친한 친구들과의 철학과 음악에 대한 나눔도 아인슈타인의 근본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드 지터와 에딩턴은 상대성이론이 정립되어 알려지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에딩턴의 객관적 관측값을 도출하기 위한 치밀한 개일일식 여정


여기에는 실험연구에서 발견되는 오류들을 최소화하려는 계획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데이터를 분석하고, (생각했던 결과와 다를지라도)모든 결과들을 객관적이 공정하게 발표하는 모습에서 과학자가 지녀야 할 윤리의식과 공정함을 배울 수 있었다.




이는 과학이 아닌 모든 상황에도 적용된다.


결국 우리의 지식의 확장과 창의력을 통한 지식의 연결의 중심에는 독서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의 끈기있는 노력은 빼놓을 수 없다. 책 중간중간에 세상일이 그렇듯 전시상황이 그렇듯 모든 일이 뜻데로 굴러가지 않는 일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운적 요소가 만연한 세상에서 꾸준함과 공정함, 진실함, 그리고 사람사이의 협력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나답게, 그리고 나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갈 수 있는 기본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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