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쓰는 스물네 번째 편지
모든 주부들의 로망인데, 자유부인! 나도 일주일만 딱 자유부인 해보고 싶어. 그것도 뉴저지에서 자유부인이라면 영혼까지 갈아서 놀 수 있을 것 같아. 자유부인으로서 첫 주말은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아 글 덕분에 "자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돼. 내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자유겠지만, 그 고정관념 자체를 확장시키는 것도 자유일 것 같아.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자유는 중요하고, 매 순간 자유롭기 위해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드는 하루야.
요새 바쁜 일정이 겹쳐지다 한가로운 시간이 이어지다를 반복하는 것 같아. 특히 최근 들어 미국에서 "백수로 지내는 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 싶은 욕망이 일어 독서와 경제공부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영어만 해도 부족한 시간인데 주의 산만한 나는 이렇게 또 일을 벌이고만 있네. 절박하게 무언가 하나에 매달려하지 않는다고 나태하거나 삶을 방관하는 건 아니니까. 내 방식과 속도로, 내 계절에 맞춰 나아가려고 해.
특히 요즘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있는데, 오늘은 최근에 읽었던 "도시인의 월든"을 읽으며 문득 떠올랐던 생각을 나눠볼까 해. 월든(Walden)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라는 미국 작가가 쓴 고전 에세이인데, 2년여 동안 자연 속으로 들어가 온 세상을 관찰하고 사색하며 느낀 점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야. 도시인의 월든은 그 책을 잘 풀이해 놓은 해설서 같은 책이었어.
이 책의 저자는 명문대를 나와 기자생활을 하다 미국 시골로 이사와 미니멀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야. 지금의 나처럼 '전업주부'인 셈이지. 확고한 자신의 신념과 담백함으로 무장한 책이어서 좋았던 점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집안일"에 대한 부분이었어.
십 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다 긴 휴식을 갖고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나에게 집안일이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안도와 동시에 집안에서의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해. 그래서 소식가인 남편 식탁에 여러 가지 반찬을 올리기도 하고, 때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각 잡고 빨래를 개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해.
하지만 이 책에서는 집안일만큼 하찮은 일은 없다고 말해. 그리고 인생은 원래 하찮은 거라고, 그 하찮음을 자각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안일을 한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거부감이 드는 문장이었는데, 두 번 읽고 리뷰까지 하며 깊게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대단할 것도 없고 별 볼일 없는 것도 없는, 그냥 하찮은 것들의 집합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특히, 너무나 하찮아서 집안일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집안일의 '본질'에 가까운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해. 어떻게 보면 인생의 '본질'에 대해 수도 없이 생각하는 내 사소한 철학 중 하나라고 하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집"이란 것은 따뜻한 곳, 쉴 수 있는 곳, 마음 편한 곳이야. 이 말은 곧 "집안일"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라는 의미로 귀결되는 거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아주 하찮고 사소하지만 내가 꼭 하려고 하는 것들이 있어.
남편이 출근할 때 대문까지 나와서 눈 마주치며 긍정의 힘을 주는 것, 퇴근할 땐 세상 최고 텐션으로 그를 맞아주는 것이야. 정말 사소하지만 최대한 지키려고 하는 부분이야. 그리고 아늑한 잠자리가 되도록 노력해. 그래서 잠이 잘 오는 향의 디퓨져, 포근한 침구류 등을 준비해 놓고 자고 일어난 후 웬만하면 정갈하게 잘 정리해 놓으려고 노력해.
색깔과 기능별로 나눠서 꼼꼼하게 돌리는 빨래, 칼로 잘라놓은 듯 완벽하게 질서 있는 정리정돈, 꼼꼼한 손기술로 만들어놓은 맛깔스러운 상차림 등의 집안일들에 비해선 아주 사소한 일들이지.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도 나에겐 집안일 중 하나인 것 같아.
내가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하고 돈을 벌어 부를 증식하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이런 하찮은 집안일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 같아. 같이 돈을 벌었을 테고, 그러면 집안일도 나눠했을 것이며 회식과 야근으로 인한 늦은 귀가도 많았을 테니까.
요즘 남편이 집에 일찍 귀가해서 재택근무를 많이 하는데, 집에 있는 그에게 왜 회사에 안 가냐고 장난을 하곤 해. 하지만 내심 남편이 일찍 오면 기분이 좋아.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 집을 정말 편하게 생각하고 있고 안식처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만약 내가 앞으로 아이를 낳고 기른다고 해도, 이 철학은 계속 유지하고 싶어.
집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 쉴 수 있는 곳, 마음의 안식처여야 한단 것.
나아에게는 혹시 이런 사소하고 하찮지만 특별히 하고 있는 집안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장난으로 툭툭 건드리며 웃음을 주는 것,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도 모두 여기에 포함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아! 그리고 우리 이번주에는 각자 자신이 무얼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좋은지, 소소한 즐거움을 열 가지씩 말해보는 건 어때? 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걸 말해 보자면, 내 경우에는 지쳐 쓰러지기 바로 직전까지 반신욕 하고 나왔을 때, 비 오는 날 혼자 천천히 와인 한 잔 마시며 오글거리는 감성에 젖는 것 정도인 것 같아. 미국에 살 때 둘 다 스스로에 대해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기도 하고, 나아는 어떨 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함을 느끼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건의하는 거야. 다음 글이던, 그다음 글이던 작성하는 글 말미에 적어보도록 하자. 기대할게!
에필로그.
내가 가장 힘든 시기 때, 키우고 있던 화초가 다 죽고 새싹 하나만 남은 적이 있었어. 엄마는 내가 가져간 새싹 하나를 다시 살려보겠다며 우유도 주고, 영양제도 주며 애지중지 키웠지. 근데 그 새싹이 자라서 나무가 된 거야. 정말 신기하더라. 그 이후로 우리 집에서는 이 나무에 내 이름을 붙여줬어. 지영이 나무라고.
어제 가족 채팅방에 이 나무에 꽃이 피었다며 엄마가 사진을 올렸어. 진짜 다 죽어가던 나무였는데, 꽃까지 피다니 믿기지가 않아. 나무도 이렇게 잘 살기 위해 온갖 힘을 내며 노력하는데, 나는 더 잘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어. 그나저나 꽃이 피는 걸 보면, 나한테 좋은 일이 오려는 걸까? 무슨 일일지 매일이 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