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만한 도시가 많아 여유가 생기면 찾는 유럽. 하지만 여차하는 순간 여행 생계를 책임질 내 전재산을 날릴 수 있는 소매치기가 들끓는 곳. 유럽은 그런 동네다.
한국에서야 카페에 노트북과 가방을 둔 채 화장실을 가는 일이 다반사지만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유럽에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단숨에 자선사업가가 될 수 있다. 갖은 수법을 써 내 가방을 훔치려는 이들이 도시 곳곳에서 숨 쉬기 때문이다. 벌써 네 번째 유럽 방문이지만 올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다.
내 몸만 한 캐리어와 어깨에 둘러멘 가방에는 나의 여행 전부를 책임질 밥줄이 담겨있다. 옷이나 생필품이야 잃어버리면 다시 사면되지만 여권, 돈, 카드를 잃어버리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것 같다. 특히 여행 길라잡이인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스투핏(Stupid)’해져 그 길로 한국행 비행기를 탈지 모른다. 더구나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동행자가 없다면 더 철두철미해야만 ‘멘붕(멘탈 붕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번에 방문한 스위스는 비교적 안전한 나라지만 네 번의 유럽 여행을 통해 느낀 것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것이다.
취리히 리마트강/사진=jeong
취리히에서 루체른으로 이동하는 그날도 그랬다. 내 여행 생계를 책임질 전재산을 몸뚱어리에 탑재한 나는 주변을 한껏 경계하며 역까지 이동했다. 기차에 올라 탄 후에도 눈알을 요리조리 돌리며 보안 단계를 격상했다.
짐 선반에 놓아둔 캐리어에 눈길을 머물던 순간이었다. 내 앞자리에 백발에 가까운 밝은 금발머리를 한 4~5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한 손에는 장미를, 다른 손에는 튤립을 들고 털썩 앉았다. 눈 크기가 나의 2배쯤은 돼 보이는 소녀는 나와 마주 앉은 채 장미와 튤립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코를 갖다 대기 시작했다. 킁킁 향기를 맡던 소녀 옆으로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앉고, 소녀는 아버지의 코에도 꽃 향기를 배달한다.
독일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소녀: “아빠 향기 좋지?” -아버지: “그러게 이거 엄마한테도 보여줄까?” 정도의 대화가 오고 간 것 같다.
소녀는 신이 난 듯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아버지는 기차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며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그래도 소녀의 목소리는 좀처럼 작아지지 않는다.
걸을 때마다 파란 불빛이 반짝거리는 신발을 신은 소녀는 그 후로도 줄곧 재잘거렸고 아버지는 낮지만 부드러운 톤으로 대화를 받아줬다.
꽃을 들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에 그야말로 무장해제가 됐다. 여행을 하며 몇 안 되는 모든 경계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취리히 풍경/사진=jeong
부녀가 나보다 먼저 내린 뒤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 무장해제된 때가 언제였을까. 몇 백만 원을 들여온 여행에서 일상보다 불안에 떤다면 이곳에 힘들게 온 이유가 있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있다.
영혼의 자유를 찾기 위해 12시간을 날아온 이곳에서 어제보다 오늘은 덜 불안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