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함께 스페인 여행을 가기로 한 친구가 별안간 한 말이었다. 2년 전부터 여행 경비를 함께 모으던 절친이었다. 거의 매일 연락하는 사이였기에 이 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의 ‘공무원 준비’ 발언은 예상치 못했다. ‘인생은 기승전 공무원’이라고 농담을 자주 주고받긴 했지만 그게 하필 지금일 줄이야...
맥주 한 잔 하자고 나를 부른 친구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헤어짐을 고하려는 연인처럼 말 끝이 무거웠다. 어렵게 입을 뗀 친구는 “사실 할 말이 있어”라며 “나 공무원 준비 시작하려고. 그래서 스페인 여행은 못 갈 것 같아”라고 죄인이 된 것처럼 말했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니 지금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다른 이들이 공무원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친구와의 스페인 여행은 힘든 직장 생활을 버티는 이유였다. 지치는 날에는 ‘스페인 검색왕’으로 빙의해 맛집이나 명소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이렇게나 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을 알기에 친구도 소식 전하기를 매우 망설인 것 같았다.
물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화가 나거나, 좌절감이 들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매우 의연한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아쉽긴 하다’ 정도가 내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친구는 ‘왜 갑자기?’, ‘다시 생각해봐’ 등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오히려 의아해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어렵게 결정한 친구의 결심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할 그녀보다는 내 상황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고 싶진 않았다.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비행기 안/사진=jeong
친구에게 소식을 들은 뒤 하늘의 뜻이었는지 때마침 이직을 하게 됐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지금이 기회였다. 여유롭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
그래서 지르듯 항공권을 사버렸다. 충동적이었지만 그날의 기분이 그랬다. 절친과의 스페인은 잠시 간직하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당초 10일 정도로 계획했던 여정은 스위스와 이탈리아로 돌렸고 일정은 20일 남짓으로 길어졌다.
여행지를 결정한 후에는 내가 이런 추진력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준비를 착착해나갔다. 숙소를 예약하고, 환전을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그렇게 정신없이 준비를 한 뒤 눈을 떠보니 나는 스위스 취리히로 향하는 항공기에 혼자 몸을 싣고 있었다.
20대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여행. 머나먼 유럽 대륙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여러 얼굴이 스쳤다. 친구와 함께 있었으면 새로운 것을 접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텐데 혼자가 되니 차분해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일상이 희미했는데 멀어지니 오히려 점점 선명해진다. 삶이 팍팍해 공무원 준비를 시작하는 친구와, 유럽으로 날아가는 나는 어쩌면 같은 선상 위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둘 모두 조금 더 나은 일상이 되면 좋겠다는 지금의 선택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