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인기리에 종영했다. 매화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마지막 화에는 14%의 높은 시청률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흥행 요인은 캐릭터와 음악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신원호 감독-이우정 작가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레트로 음악이 OST를 넘어 드라마 전면에 등장했다. 세월은 흘러도 음악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주인공 5인방이 밴드가 되어 연주한 옛 감성의 음악들은 검색어와 음악 차트를 점령하며 인기를 실감케 했다.
한 명 한 명 살아 있는 주인공 5인방의 개성 있는 캐릭터도 인기 요인이었다. 특히, 조정석 배우가 연기한 익준은 친숙한 얼굴로 극을 이끌어나감과 동시에 때로는 다른 인물들을 돋보이게 하는 감초 역할을 하며 웃음을 주기도, 밴드에서 중심을 잡으며 놀라운 가창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진지함과 유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익준 캐릭터는 시청자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을 뿜어냈다.
궁금하지 않은 드라마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고 있자면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아쉬움은 다음 전개가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궁금증을 던진다. '이다음에 어떻게 되는데?'라는 궁금증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이다. 시청자들은 <스카이캐슬>의 예서가 서울대를 갈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스토브리그>의 드림즈가 강팀이 될 수 있을지, 혹은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가 장가라는 거대 라이벌을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최근 종영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는 이러한 궁금증이 없다. 매화마다 단발적인 에피소드가 시작하고 종결되는 구조다. 수많은 의료진과 환자들이 등장하지만, 전체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큰 서사가 없다. 누군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줄거리를 물어본다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미국 의학 드라마는 환자만 치료하고, 일본 의학 드라마는 환자를 치료하다 교훈을 주고, 한국 의학 드라마는 환자를 치료하다 사랑을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야말로 '병원에서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다 사랑하는 이야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기승전 로맨스'의 구조가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문제점인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안다. 병원에서 사랑만 하는 이야기, 이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설득력 없는 로맨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거의 유일한 궁금증은 로맨스다. 과연 누가 누구와 이어질지, 이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가 유일하게 남는다. 인물 사이의 관계만 있을 뿐 스토리는 부재하다.
문제는 이 러브라인들이 모두 느닷없고 뜬금없다는 것이다. 준완(정경호 분)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익준의 여동생 익순(곽선영 분)과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온 익순을 치료하게 된 준완은 익준의 여동생 이름이 미키(익준의 반려견)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녀의 존재에 무심했지만,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이미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어 있다.
정원(유연석 분)은 의사지만 신부를 꿈꾼다. 그는 효자지만 어머니의 격렬한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만큼 신부는 정원의 오랜 꿈이다. 정원과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부터 이기고 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정원은 사랑하는 겨울(신현빈 분)을 위해 신부의 꿈을 포기한다. 모태 솔로인 정원은 겨울에게 무심한 듯 의미심장한 눈빛을 몇 번 던진 것이 다이고, 둘 사이에 이렇다 할 서사가 쌓인 적도 없지만, 겨울은 정원의 엄마도 이기지 못한 하느님을 가뿐히 이겨버린다. 방영 내내 시청자들에게 가장 큰 지지를 받은 커플이지만, 제작진은 너무 많은 관계 발전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익준은 대학 시절 송화(전미도 분)를 좋아했지만, 송화를 짝사랑하는 친구 석형(김대명 분)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그 후 익준은 여러 연애를 거치고, 결혼을 하고, 아들인 우주를 낳고, 이혼도 하지만 송화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을 내비친 적은 없다. 익준이 20년 동안 송화를 좋아해 왔는지, 아니면 이혼을 하니 잊고 지낸 옛 감정이 되살아난 건지 시청자들은 알 수 없다. 그가 20년 동안 숨겨온 감정을 왜 이제야 드러내는지도 알 수 없다. 시청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익준의 고백이 로맨틱하게 포장되었지만 사실 배려 없고 일방적이라는 것뿐이다.
제작진은 시청자들에게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설명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이들은 애틋해져 있다. 시청자가 모르는 사이에 가벼운 연애를 해왔던 준완이 진지한 로맨티시스트가 되고, 정원은 어린 시절부터의 꿈을 포기할 정도로 겨울에게 진심이며, 익준은 20년 동안 숨겨온 마음을 갑자기 고백한다. 신경외과 회식 자리에서 송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후 노래방에서 고백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며 울먹이는 익준의 감정은 그가 얼마 전 이혼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애틋하다. 드라마의 거의 유일한 서사인 로맨스가 설득력을 잃으니 시청자들에겐 급작스러운 전개만 남는다. 서사가 뒷받침되지 않는 로맨스에는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다.
우연과 기적으로 범벅된 반전들
이 드라마의 다음이 궁금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뻔한 '반전 클리셰' 때문이다. 거의 매화마다 초반의 전개를 뒤엎는 반전이 등장한다. 제작진은 모든 에피소드의 마무리엔 반전이 등장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것만 같다.
반전이라는 것은 의외성에서 오는 쾌감이 가장 큰 힘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거나, 예상이 가능하더라도 작가가 촘촘히 쌓아온 복선이나 서사를 마지막에 터뜨리는 것이 시청자들이 반전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반전에서는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힘들다. 모든 반전이 초반에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편견을 뒤엎거나, 어디선가 갑자기 기적이 나타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진상인 것 같았던 보호자는 사실 의료진에게 감사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1화), 철부지인 줄 알았던 어린 보호자에겐 사실 드러내지 못한 부성애와 모성애가 있었다(3화).
그렇기 때문에 반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모든 사건 전개는 모두 초반 10분을 보면 예상 가능하다. 9화에서는 과체중에 나이가 많아 딸에게 간이식을 해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익준은 동료 간호사에게 저 아버지는 간이식을 해줄 사람이 아니라고 호언장담한다. 이 드라마의 전개 특성상 익준의 편견 가득한 대사를 듣는 순간 시청자들은 그 아버지가 마지막엔 딸에게 간이식을 해주기 위해 기적처럼 살을 빼서 오리란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시즌3까지 제작 예정인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아직 두 시즌이 더 남아 있다. 가장 인간적인 의사,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따뜻한 메시지를 던진 이 드라마가 시즌2에서는 좀 더 설득력 있는 서사로 돌아오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