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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 번째 재생목록 Nov 17. 2020

[동백꽃 필 무렵] 가장 보통의 영웅들

드라마가 현실을 위로하는 법

  누구나 인생에서 조연이 된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인생이 마치 잘 짜인 드라마 같아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조연인 나는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이 다른 사람을 빛내기 위해 화면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같아 자존감을 갉아먹는 그런 순간들.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에겐 그 시기가 작년 겨울이었고, 그때 이 드라마를 만났다.

  <동백꽃 필 무렵>이 방영한 지 일 년이 되어 간다. 모두가 수작임을 인정하는 드라마인 만큼, 나는 이 드라마가 좋았던 이유를 당장 열 개쯤은 바로 댈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단연 <동백꽃 필 무렵>이 내세우는 영웅들의 모습이다.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영웅인 것이 보통이다. 마블 영화의 히어로들처럼 굳이 특별한 초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이기에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돌풍에 휩쓸려 북한으로 넘어가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 평범하고 소소한 조연들이 주인공을 살리는 영웅임을 자처한다. 주제의식만 어설프게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에선 진짜 보통의 사람들이 영웅이다.

  이 드라마가 '가장 보통의 영웅들'이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잘 만들어진 조연들의 서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살아 숨 쉰다. 간혹 주변부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오히려 주인공이 밀려나는 드라마도 있는데, <동백꽃 필 무렵>에선 조연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탄탄한 스토리가 주인공 동백(공효진 분)의 서사와 얽혀 시너지를 낸다.

  특히 필구(김강훈 분)는 방영 당시에도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지금껏 한국 드라마에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배제되어 왔던 아이의 시선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낸 드라마가 있었을까 싶다. 이런 힘 있는 조연들이 있었기에 이 드라마가 던지는 메시지에 시청자들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나만 두고 다 결혼만 해. 무슨 엄마 아빠가 다 결혼만 해" (35화) 


  이 드라마의 압권은 마지막 화에서 드러난다. 주인공 용식(강하늘 분)은 드라마의 주인공답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 범죄가 있는 곳에 곧 용식이 있고, 운명처럼 범죄자를 소탕한다. 고등학생 때 은행에서 무장강도를 도시락통으로 때려잡으며 이 비범한 능력의 시작을 알린 그는, 택시 운전을 하다가도 하필 소매치기를 목격하며, 택배 일을 하다가도 강도 살인범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인물이다.

  하지만 연쇄 살인범 까불이로부터 동백을 구한 이는 범죄자를 잡는 운명을 타고난 용식이 아니다. 보쌈이니 백설기니 동백의 끼니를 챙기겠다고 나서는 옹산의 평범한 사람들이 부리는 오지랖이 결정적인 위기에서 동백을 구했다. 난 이 장면에서 참 많은 위안을 받았는데, 동백을 위기에서 구한 이가 어느 날 갑자기 기적같이 동백의 인생에 등장한 용식이 아니라, 5년을 옹산에서 함께 지지고 볶았던 동백의 일상, 게장 골목의 상인들이어서 좋았다.

동백을 구하기 위해 모인 옹 벤져스. "나쁜 놈의 폭주는 우리 속의 가장 보통의 영웅들을 깨운다. 옹산의 소소한 히어로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33화)

  이 장면뿐만 아니라 정숙(이정은 분)의 신장 수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합심하는 옹산 사람들의 모습은 이 드라마에서 이들이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영웅이고, 또 다른 주인공임을 시사했다.


  "기적은 없다. 착실히 달려온 마리오의 동전 같은 게 모여 기적처럼 보일 뿐"(40회)이다. 그러니 우리 기적을 기다리지 말자. 기적을 믿지 않고 나 자신을 믿는다는 동백의 말처럼, 차곡차곡 열심히 쌓아온 내 일상을 믿으며 내가 내 인생의 영웅임을 의심하지 말자. 사실 이 드라마를 처음 봤던 작년 겨울과 지금, 내 처지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조연 같지 않다. 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현실을 위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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