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가야 해.
여행 중 좋지 않은 날씨를 만나면, 그럼에도 좋았다고, 그런 날씨 속 그 곳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좋은 날씨와 함께였다.
날씨가 좋아야 신경써야 할 것이 줄어든다. 신경쓸 것이 줄어든다는건 여유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사진도 잘 나온다. 잘 나온 사진은 그 곳의 추억들도 잘 미화한다. 흔히 말하는 찬란한 날이라고 일컫듯이. 그 찬란함은 어쩔 수 없이 좋은 날씨, 따스한 햇살에서 비롯된다. 런던의 날씨는 나쁜편은 아니었지만, 빽빽히 들어선 구름들이 해를 가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 날씨를 알려주는 핸드폰 화면 위에 구름이 없는 해 모양이 반짝 떠 있다. 구름이라는 방해꾼없이 어디든 햇살이 내려앉는 그런 날씨였다.
그래서 세븐시스터즈를 오늘, 지금 가야 했다.
화소가 높은 카메라를 통해 보듯 햇살아래의 런던의 모습이 어느때보다 선명했다. 그 거리의 본연의 색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 중에는 이렇게 발 길 닿는 모든 곳이 여행지였다. 여행을 시작하면, 끝나는 날까지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은 항상 진행형이다. 큰 캐리어를 끌거나 사진을 찍을 때 뿐만 아니라, 거리를 거닐고 무언가를 먹고 잠이 드는 단순하고 당연한 행위들의 반복에서도 여행은 진행중이다. 이 모든 일상적인 행위 조차 여행이 되는 것이다.
잘못 온 기차역에서 헤매고 있을때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같이 표를 끊고 기차에 탔다. 한적한 기차안 이었다.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이미 그 전 기차, 어쩌면 그 전전 기차를 탔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길을 헤매고 다른 이들을 기다리느라 생각보다 늦어진 시간에 마음은 조급했지만, 기차는 마치 주변의 풍경도 돌아보라는 듯 천천히 가고 있었다. 어느새 도시를 지나 한적한 풍경에 접어들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과 어제도 본 것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기차 역에서 나오니 긴 옷을 챙긴게 무색할정도로 뜨거운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바다도 아닌데 거리가 반짝 거렸다. 또 버스를 타고 가는, 조금은 긴 여정이지만 도시를 벗어나 보는 풍경들에 눈이 즐겁다.
그렇게 차창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가다보니 사람들이 대부분 내리는 정류장을 지나쳤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내리고 보니 그곳엔 우리 뿐 이었다. 그 전 정류장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여기서부터 세븐시스터즈를 찾아가기로 했다.
잘 못 내린 곳에 대한 호기심보단 두려움이 앞섰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조급함이 앞섰는데, 앞서서 나를 기다리던 풍경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잘 못 내린 곳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여행 중에 '잘 못' 이라는 것은 없는 걸까. 잘못 내린 곳이 가장 잊혀질 수 없는 풍경이 되다니.
세븐시스터즈를 가기 위한 길 위에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만났다. 그저 한적한 도로와 그 양옆에 자리한 푸른 들판일 뿐인데 왜 이토록 가슴이 벅찬지. 유독 좋았던 오늘의 날씨 때문일까, 여행이라는 들뜬 기분때문일까, 그저 처음 보는 광경에 새로운걸까, 아니면 원래 이런 풍경들을 좋아하던 나를 비로소 알게 된 것 뿐일까.
저 푸른 들판 위에 가지고 온 돗자리를 깔고 기차를 타기 전 사온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그 어떤 비싼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보다 좋다며 말을 꺼냈지만, 사실 이 곳을 오기위해, 이 곳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라는 물질적 비용과 용기와 선택 결심 등과 같은 심리적 비용이 투입 되었는지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곳이야 말로 그 어떤 비싼 레스토랑 보다 비싼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값비쌈이라면 몇번이고 사치를 부리고 싶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집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앞에 아마도 그 집에 사는 이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부러운 감정이 든다. 성급한 부러움이라는 것을 안다.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풍경일뿐, 그 곳에서 산다고 내가 지금 느낀 감정을 매일 느낀다고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에 가능한 감정들일 수 도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잠깐은 부러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극히 나 중심적인 생각이지만, 여행은 어느때보다 지극히 나만 생각하도록 만드는 면이 있다.
이 들판을 달리기도하고 뛰기도 한다. 이렇게 내가 이 들판을 거닐었다는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었나보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런 거리에 흠뻑 빠져 걷다보니 세븐시스터즈, 즉 7개의 절벽에 도착했다. 걸어온 거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 이었지만 이 넓디 넓은 절벽과 하늘과 바다가 주는 느낌은 고독이었다.
절벽 그 위에 서서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지점을 내려다 보면, 이곳에 오롯이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쓸쓸함 보단, 해방감에 가까운
그런 고독이었다.
이 곳에서서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을 바라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가 될 것만 같았다. 이 절벽에서 발돋음을 하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버릴 것 같았다.
좋다, 라는 말을 오늘 몇번이나 뱉었는지. 이렇게 좋다라는 말을 몇번이고 반복하던 하루가 있었던가. 여행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그런 하루일까.
좋다, 너무좋다, 너무 좋아 라고 범벅된 하루 말이다.
절벽 밑에는 내려가보지 못했는데 벌써 막차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지만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돌아봐도 아까 보고 또 봤던 그저 하늘과 푸른 들판인데,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봐도 생기는 것은 후회와 아쉬움이 아니라 기분 좋은 풍경이다.
오늘 참 찬란한 날씨였다.
오늘 참 찬란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