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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Jan 14. 2019

이런 날도 있는거지

이탈리아 첫 도시, 베니스







매우 이른 아침에 숙소를 나섰다. 모두 잠든 조용한 새벽에 짐을 정리하려니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매우 크게 들렸다. 어차피 소리가 날 거라면 빨리 싸서 나가버리는게 낫다는 생각으로 후다닥 짐을 정리하고 방을 벗어났다. 텅빈 로비를 지나 숙소를 나와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해는 저 지평선 아래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나보다 부지런했던 해였는데, 이렇게나 일찍 나와야 해와 같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왠지 아쉬워 까치발을 들며 두브로브니크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키가 작은 탓에 몇몇 건물들에 시야가 탁 막히고 말았다. 잠깐 내려갔다 올까 싶다가도 언제 버스가 올지 몰라 발을 떼지 못했다.


 도착한 버스엔 이미 사람이 가득차 있었다. 두브로브니크로 처음 오는 길에 보았던 풍경들을 볼 수 있는 오른쪽 창가차리는 만석이었다. 결국 두브로브니크의 마지막 모습은 버스정류장에서 빼꼼 내밀며 바라보았던 모습이 되는가 했지만, 하늘 위 비행기 안에서 모든 걸 내려다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자그레브에서부터 두브로브니크까지 크로아티아가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파란 바다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눈부셨고, 반짝거렸다. 그래서 지금 독일을 들렸다 다시 베니스로 내려오는 이상한 노선의 비행기를 타는 것도 전혀 번거롭지 않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여행지의 추억을 좌지우지하는 건 대부분 그 여행지의 진짜 모습보단 다른 요소들이다. 이를테면 몸 상태, 동행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 날씨, 소매치기나 인종차별등 불쾌한 경험들 혹은 미소와 친절함 같은 고마운 경험들이 여행지의 추억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9박10일은 연일 40도가 넘는 날씨였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더위가 이탈리아 여행 내내 따라다녔고,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도 따라다닌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그로 인해 달궈진 땅이 내뿜던 열이 그 곳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곳에서의 기억들은 마치 그 위에 뜨거운 증기가 서려있는 것처럼 뿌옇고 답답하다. 의식적으로 그 증기들을 닦아내야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이탈리아 여행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진다. 누군가 이탈리아 여행에 대해 물으면 '별로였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이런 나의 경험이 매우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다.


이탈리아는 매우 더웠고, 불쾌한 경험을 종종 마주했고, 여행 막바지였기에 몸이 지치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것들보다 더 크게 작용했다. 지금은 그리움이 크기 때문에 그 더위조차 문득 그리워질때가 있지만..


처음부터 삐걱거렸던 것 같다. 독일 입국심사(입국도 아니지만..)에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환승표시와 베니스행 티켓을 보여주어도 내 말은 듣지 않고 내 여권을 이리저리 살폈다. 옆줄에 서있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내 뒤에 있던 사람들이 옆줄로 옮겨가 모두 나갈때까지도 나는 붙잡혀있었다. 그 후 무사히 통과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불쾌한 감정이 조금씩 쌓여갔다.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의 여행지를 떠올리면 기분나쁜 몇몇의 추억들이 앞다투어 나타난다. 그러고도 한참을 생각해야 슬금슬금 다른 장면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기억들이 매끄럽게 흘러가긴보단 조금씩 끊기고, 그 사이사이엔 무더운 바람과 흘러내리는 땀이 가득 메우고 있다.


베니스는 물로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끈적이는 한국의 습도 높은 여름 날씨와 비슷했다. 물로 둘러쌓야있기에 바로 앞에 있는 반대쪽으로 넘어갈때도, 수상택시 정류장이나 다리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했다.



텔레비전속 보았던 배와 물로 둘러쌓인 풍경이 보고 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상도 잠시, 뜨거운 햇살과 끈적거림 그리고 식당에서 마주한 불쾌한 경험들이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내 기분이라고 말하지만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누군가에 의해, 무엇에 의해
더 자주 변하는게 내 기분이었다.
지금 내 기분도 이 곳의 날씨와
불친절했던 식당 종업원이 정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들이 내 눈앞에 있는 풍경들에 어떤 색을 칠하는 듯 했다. ‘그다지 예쁘지도 않네, 여기를 왜왔지’ 라는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분나쁜 색들을 말이다.


툴툴 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기분을 풀어줄 마법의 장면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결국 이런 기분으로 걷는다면 내 발이 닿는 곳 마다 기분 나쁜 색들이 칠해질게 뻔했다.


그냥 오늘을 운이 없던 날로 치기로 했다. 그리고 운 없는 오늘을 떠나보내고 내일의 새로운 날을 맞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꽤 많은 날들이 운이 좋았다. 어쩌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니 떴다면 새로운 날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좋은 하루라는 점을 자주 잊었다. 눈을 뜨는게 버겁고 눈을 뜨고 해야할 일들이 지겨웠다. 그건 어제와 다를바 없는 하루였기 때문이다. 어제의 일이 오늘로 이어지고 어제의 후회가 오늘의 후회가 되고 어제했던 생각과 다름 없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날을 받아도 전혀 새로운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의식적으로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이라는것을 쉽게 실감했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마주하게 될것이 넘쳐나는 하루만큼 새로운 날도 없었다.


그래서 어제의 불쾌한 기억은 어제로 두어야했다. 그 기억들을 다음날로 끌고 오면 오늘은 어제의 연장선이 되어버린다.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어제와는 다른 기억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챙이 큰 밀집 모자를 하나사서 푹 눌러썼다. 그 모자가 만들어주는 작은 그늘 안에서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베이커리에서 한입 베어물었던 빵의 맛이 더위 다음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사람들로 혼잡하고 앉을 곳없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에 왔음을 느꼈다. 물론 그동안 강렬한 햇살, 호객행위, 소매치기 위험 등으로 이탈리아에 왔음을 매우 실감했지만, ‘맛있다’라는 매우 긍정적인 감정으로 느낀건 그 곳에서가 처음이었다.






눈이 부셔 차마 바라보기 힘든 곳은 눈 대신 카메라로 담았다. 수시로 땀을 닦아내거나 손 부채질 하는데 집중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긴장하며 가방을 꽉 붙잡고 급하게 빠져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그 곳에 있을때는 미처 몰랐거나 놓쳤던 것들을 훗날 사진을 정리하다 발견할 수 있었다.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 운하들이 건물들 사이를 흐르며 주던 운치있던 풍경, 혼잡하고 좁은 곳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던 배들의 화려한 생김새, 좁은 배가 가까워지는 만큼 커지던 풍경들, 넓은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의 아름다운 자태, 어지럽게 뒤섞인 선착장과 배가 하늘과 물 사이에서 동동 떠있는 모습 , 제각기 다른 크기와 색깔들이지만 어울리게 서있던 건물들의 모습, 해가 저물며 조금 일찍 뜨기 시작한 별빛처럼 빛나던 불빛들, 같은 걸 놓쳤었다.








다음날 피렌체행 기차를 타기 전, 기차역 옆에있는 꽃나무가 활짝 핀 상점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엽서를 사서 친구들에게 짧은 이야기를 쓴 뒤 노란 우체통에 넣었다. 도착할까 싶었던 엽서는 다행히 어떤 엽서보다 빠르고, 무사히 도착했다. 이제 나는 마지막 두 도시를 앞두고 있었다. 내 여행도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아직까진 무사하게 진행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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