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기완, <야밤의 공대생 만화> 독서 후기
한 커뮤니티에서 범상치 않은 드립으로 독자들을 홀리는 만화를 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림 실력은 비록 보잘것없었지만, 공대 대학원생이 틈나는 대로 그렸다는 만화에는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밈과 유행어가 가득해서 읽는 재미가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맹기완이 그린 과학만화, <야밤의 공대생 만화>를 만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심 놀랐다. 서울대생이, 그것도 공대생이 이렇게 재밌는 만화를 그릴 수 있다니!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만 나는 명문대생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명문대생을 향한 편견 중에는 ‘재미없는 공부벌레’라는 이미지도 있었기에, 과학만화를 그려서 출판까지 성공한―그걸로 베스트셀러까지 진입한!―맹기완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신은 공평하다고 어디선가 들었는데, 할 거면 공부만 잘하던지. 만화책으로 나를 웃기기까지 하다니.
맹기완은 <야밤의 공대생 만화>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대 대학원생으로서 자신의 이름으로 내는 첫 출판물은 논문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만화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맹기완은 그림 실력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커뮤니티에 꾸준히 그림을 올렸고, 결국 그린 자에게 기회는 열렸다.
<야밤의 공대생 만화>를 읽고 꾸준함의 위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올랐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20대 중반이었다.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였고, 그런 이유로 <노르웨이의 숲>과 <해변의 카프카> 같은 소설에서 하루키가 대변하는 ‘청년의 상실감’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하루키의 글을 소설로 먼저 읽은 나는 책방에서 우연히 본 에세이의 저자가 하루키인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책을 집었다. 그때가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은 순간이었다. 안개와 이끼가 낀 것 같은 무겁고 습한 이야기를 찾아서 게걸스럽게 읽어나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하루키의 에세이 역시 그의 소설처럼 나를 어둡고 미스터리한 세계로 데려가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하루키의 에세이는 읽을수록⋯⋯ 음⋯⋯ 읭? 너무 간단하잖아. 그렇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정말이지, 쉽게 말하면 알맹이가 없었다. 나체로 집안일을 하는 주부도 있다고 하네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허허, 라며 익살을 떠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마치 진중한 스타일이 좋았던 모범생 친구를 도박판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은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 모두 좋아하지만, 당시에는 한동안 맥이 빠졌던 게 사실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일본에는 특이한 러브호텔 이름이 많다던가, 자기 집 고양이는 초능력을 쓸 수 있다던가, 연필을 보면 세일러복을 입은 여고생이 생각난다던가(정말 뜬금없다) 하는 유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여러분, 하루키 작가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소설만 보고 속지 마세요, 하는 폭로글 같지만, 뭐⋯ 읽은 것을 사실대로 말할 뿐이다. 내가 읽은 에세이 대부분은 아직 30대의 청년이었던 하루키가 잡지를 통해 연재했던 글이다. 가령 하루키가 <주간 아사히>에 ‘무라카미 아사히도’라는 칼럼을 연재할 당시는 하루키가 원숙한 작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 작품인 <노르웨이의 숲>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의 상실감을 하루키 특유의 감성으로 다루고 있을 때, 같은 시기 하루키는 앞서 말한 가벼운 글들을 부지런히 잡지로 날랐던 것이다.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라면, 잘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주어진 일을 언제나 잘할 수 있을까? 하루키가 데뷔한 지 올해로 43년이 되었다.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고는 기대와는 다른 글에 맥이 빠졌었지만, 결국은 그마저도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은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언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저 ‘하는’ 것이다. 넘어지거나 상처를 입어도 다시 일어나서 묵묵히 같은 길을 걷는 게 때로는 중요하다. 우리나라 여행 유튜버 최초로 100만 구독자를 달성한 ‘빠니보틀’ 채널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본 Q&A 영상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큰 아이를 둔 엄마입니다. 제 큰 아이는 빠니님을 롤모델로 삼고 있어요. 자기도 빠니님처럼 살고 싶다고. 제 아들은 영상에서 접한 빠니님의 모습 그 뒤편의 인내와 수고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어느 구독자의 질문에 빠니보틀이 답했다.
“저를 롤모델로 남는 건 개인적으로 반대입니다. 하하. 그냥저냥 살고 있는 제 인생에서 어쩌다 유튜브가 얻어걸린 거라고 생각하고요, 차라리 아드님이 저보다는 학구적이고 방향성 있는 유튜버 분들을 좇으셨으면 좋겠네요.”
무언가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겁을 먹기 마련이고, 이미 이룬 사람을 우러러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룬 사람 역시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빠니보틀의 말대로, 하다 보면 얻어걸리는 것이다. 하루키는 말했다. 내일 자신의 소설에서 어떤 이야기가 일어날지 모르는 채로 잠이 든다고. 장편소설을 쓰는 중견작가조차 내일 자신이 어떤 글을 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잠이 든다.
하루키나 맹기완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몸소 말한다.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저 하는 것이라고. 어떤 작품이 마스터피스가 될지, 어떤 채널이 100만 구독자를 달성할지,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오늘날 돈이 되는 콘텐츠의 특징은 뭘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면 콘텐츠의 질은 상관없이 돈이 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따라서 실력은 부족하지만 남들의 이목을 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자신의 콘텐츠를 플랫폼에 꾸준히 들이붓는 것, 즉 꾸준함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오늘날 콘텐츠 시장은 가끔씩 강력한 한방을 날리는 선수보다, 지치지 않고 잽을 날리는 선수를 원한다. 결국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