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시 시작
작년 그러니까 2018년 9월 3일, 비행기에서 내려 프랑크푸르트 공항 안 만남의 광장으로 걸어가는 내 머릿속에는 ‘씻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 같아 보니 가방에서 가로세로로 두 번 접어 두었던 A4용지를 펼쳐 보이고, 흰 종이 위에는 돋움체 40pt 크기로 내 이름이 적혀있다. 공항에서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 나의 픽업 버디다. 일본을 특히 좋아하던 그의 이름은 모리츠(Möritz, 애칭: Moe). 그렇게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숙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버스를 환승하려 내린 루이젠 플랏츠(Luisen Platz)를 보며 처음으로 공항 이외의 유럽에 발을 내디뎠던 나는 이곳을 예쁜 광장이라고 했더니 모리츠는 유럽에서 가장 못생긴 곳이라고 했었더라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을 지나면 기숙사 단지가 나타난다. 계약서를 쓰고 입주했다. 문이 열리고 번지점프를 뛴 사람이 한 번 튀어 오르듯이 0.1초 후에 살짝 튀어 오르는,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생긴 엘리베이터에 한 번, 복도에서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말 그대로 개방적인 분위기에 놀란다. 5명이 함께 쓰는 플랫이지만 아직 아무도 없다. 이전 교환학생들이 맡겨놓은 짐을 찾으러 아래층 플랫 오가길 서너 번. 숭고한 노동으로 기본 생활 기반을 마련했다.
공유기 작동법도 모르겠고, 방법을 검색할 인터넷도 없어서 입사하면서 받은 종이 약도에 의지하며 가장 가까운 마트로 향했다. 모든 게 새로워서 이것저것 보다가 신선식품 냉장고에 있던 병을 "살짝" 건드렸는데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마그마처럼 탄산이 분출되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한다. 타지에서의 첫날, 도망갈 배짱이 없어, 뭔지도 모르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병을 구입한다. 그리고 지름길을 찾겠다며 다른 길로 애먼 잔디를 헤치며 돌아오다 발목을 삐었었지. 네트워크 접속 불가로 인해 다른 교환학생들과의 피자 먹기는 물 건너가고 혼자 저녁으로는 뭘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어쩌다 사 온 그 병이 정말 달콤한 와인이었고, 그 도움으로 행복하게 첫날이 저물었던 건 확실하다.
그 맛을 못잊어 다시 찾으려했지만 더이상 볼 수 없었었다.
그리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마지막으로 남은 병들은 판트 하기 위해 들른 그 마트, 그 신선식품 냉장고에 일 년 만에 다시 그 병이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