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남은 돈을 모두 비행기에 배팅했다.
나에게 그동안 비행기표는 '올해에도 너무 고생했어.'라는 의미로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보상이었고, 비행기표를 끊는 순간은 행복과 짜릿함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짜릿함이 호주에서는 스릴러물로 바뀌고 말았다.
2020년 3월, 퀸즈랜드 전체에 락다운이 시작됐다. 그 주에도 나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수십 개의 이력서를 들고 루시 언니와 쇼핑몰을 돌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락다운 전 마지막 들린 카페에서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해서 급하게 비행기표를 찾아봤던 것이. 그리고 보았던 충격적인 비행기의 가격이 말이다. 나는 중화항공을 타고 광저우를 거쳐 브리즈번으로 왔다. 수화물 2개를 포함하여 총 31만 원의 가격으로 편안하게 도착을 했었는데, 이제는 이런 가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저렴한 것이 에어 아시아, 57만 원. 그다음으로는 타이 항공 87만 원... 이마저도 광클의 민족답게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매진되고 말았다. 서버는 불통. 그리고 락다운과 동시에 얼마 되지 않아 호주는 국경 봉쇄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봉쇄는 2021년 8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몇 분 만에 매진이 되는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이 커져 그 뒤로도 며칠 동안 비행기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어떤 날은 US $8,870 (약 1135만 원)까지 뜬 날도 있었다 (무려 38시간이 걸리는데도 말이다.) 이때 이후로 한국에 돌아가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락다운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국 계좌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을 호주 계좌로 옮기기 시작했고, 집세를 제외하고 일주일에 2만 5천 원 이내로 쓰면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3주 정도 지났을까. 골드코스트에 사는 학과 후배 Y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지금 중화항공 떴어 빨리 예매해. 가격은 118만 원!" 그날은 H의 생일 아침이었는데, 생일 음식을 준비하다 우당탕 방으로 뛰어가서 그 누구보다 빠르게 예약을 했다. 예약 완료 메일이 발송됐다.
"끄읏!!!! 탈출이다! 나 이제 한국 간다"
올 때 보다 3배 이상 비싼 가격이었지만, 여기서 계속 지내면서 나갈 비용을 생각하면 지금 이 선택이 맞다고 확신했다. 안심이 된 동시에 워홀을 마치고 꿈꿨던 캐나다 유학생활, 발리 여행, 선샤인 코스트에서의 패러 글라이딩...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전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 같이 H의 생일을 축하할 때, 뉴스 기사가 떴다.
"언니, 우리 못 갈지도 모르겠는... 데?"
"뭔데?"
"대만이 봉쇄됐어."
(대만은 우리의 경유지였다)
그리고 정말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표가 취소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당시 빠르게 확산되고 있던 코로나에 대응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나라가 국경 봉쇄를 선택했는데, 그중 대만의 타이베이, 싱가포르 그리고 태국의 방콕은 경유가 가능했다. 이 날 대만과 태국이 봉쇄되었고, 대비책으로 끊어 놓은 싱가포르 경유 티켓도 쓸모없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싱가포르도 봉쇄되었기 때문.
맞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한국에 갈 방법이 없었다. 고립됐다.
격렬했던 티켓 전쟁을 마치고 우리에게는 더 지독한 환불 전쟁이 남아 있었다.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예약을 한 상황에서 국경이 봉쇄되고 항공료를 환불해줄 여력이 안 되었던 항공사들은 1년 내에 사용 가능한 마일리지나 포인트로 대신 지급을 원했고, 이 마저도 불가했던 작은 항공사들은 나 몰라라 식으로 항공료의 20 - 50%만 돌려주었다. (에어아시아 그리고 타이항공을 끊었던 사람들은 큰 배신감에 휩싸였다)
가진 돈을 거의 모두 비행기표에 배팅한 상태에서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루시 언니는 환불에 필요한 정책과 정보들을 노트에 꼼꼼히 적어주었고, 나는 전화를 맡았다. 평소 전화가 부담스러워 배달앱이 생긴 것에 무척이나 행복해했던 나는 '돈'이 걸리자 전투태세가 되었다. 상대는 중화항공 그리고 싱가포르 항공. 예상대로 전화 연결에만 1시간 30분이 걸렸다.
뚜뚜뚜- 찰칵.
"안녕하세요, 중화항공입니다."
"안녕하세요. 환불 절차에 대해 알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제가 O월 O일에 예약한 비행기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갑자기 취소가 되었어요. Full refund 가능하죠?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full refund가 어렵습니다. 포인트로 드려도 될까요? 1년 내에 언제든 사용 가능합니다. "
"음, 저는 그 포인트보다는 돈이 필요합니다. 저 역시나 긴급 상황이라 다른 비행기표를 위해 그 돈이 필요하거든요. "
명확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자 중화항공은 생각보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우리는 2주 이내로 결제한 계좌로 돈을 지급받았다. 당일 환율에 따라 가격차이가 좀 났지만 말이다.
문제는 싱가포르 항공이었다. 대형 항공사 같지 않게 정말 정말 답답했다. 게다가 억양이 달라 알아듣는데 꽤 애를 먹었다. 다른 항공사들과 마찬가지로 싱가포르 항공도 포인트 지급을 내세웠고, 그 마저도 service fee (환불 시 수수료)를 빼고 줄 수 있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싱가포르 항공과는 약 3번의 전화, 연결 시간까지 포함해 7시간 동안 전쟁을 치렀다. 끊임없이 툭툭대며 환불 불가를 외치던 싱가포르 항공 직원은 "이건, 그쪽 항공사가 임의적으로 취소한 거예요. 적은 돈도 아니고 무려 120만 원이에요. 싱가포르 항공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선을 가지고 있고, 아시아에서 평판 1위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소비자들을 곤란하게 하는 건 굉장히 실망스럽네요. 저희는 이 돈이 포인트로 싱가포르 항공 측에 묶여 있길 원하지 않아요."라는 브랜드 이미지 언급에 서서히 백기를 들었다..
토플 단어책 1과 3번, 평판 (reputation)이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암기한 것에 감사했다. 결국 싱가포르 항공은 service fee로 약 9만 원 정도를 떼고 입금을 해 줬다. 약속한 것과 달라 화가 났지만, 더 싸울 힘이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불친절한 직원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환불 전쟁을 거쳐 다시 모인 돈으로 우린 올 때의 5배에 달하는 150만 원짜리 전세기를 끊었다. 호주는 국가가 전세기를 보낼 수 있는 리스트에 없었기 때문에 한 여행사가 나서 돈을 모아 대한항공에 요청을 했고, 빈 비행기로 와서 호주에 고립된 우리를 태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이 가격은 정말...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여기까지도 평탄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여행사에 돈을 먼저 보내고 확정을 받기까지도 기다리는 동안 여러 곳에서 우려 섞인 말이 나왔기 때문. 대한 항공 페이지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고, 점점 많은 여행사들이 파산신청을 하고 사무실을 비우는 상황에서 혹시 이곳도 사기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다행히 전 호주 한인회 회장이었다는 여행사 사장님은 전세기를 띄워 준다는 약속을 지키셨고, 우리가 탄 1차 전세기 이후로도 총 4차에 걸쳐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한국에 귀국시켜 주었다.
4월 말, 우리는 봉쇄된 호주에서 탈출했다. 졸업 후 나름 원대한 꿈을 가지고 온 호주에서 계획했던 2년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한 채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행기 하나로 패닉에 패닉을 더했던 하루하루들이 조금은 아쉽다. 하지만 만약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을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바이러스, 타국에서의 락다운과 국경 봉쇄, 기약 없이 길어지는 백수생활 그리고 줄줄이 취소되는 비행기들까지.
그냥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