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빗 [13]

by WLS

남편이 떠난 후 나를 살린 것은 CM(Customized Medicine)으로 제조한 항불안제와 로빗이 음료 스테이션에서 만들어 준 뉴트리션 드링크뿐이었다. 겨우 연명할 정도의 영양소만 섭취하면서, 항불안제 용량을 계속 늘려가면서 나에게 남은 것은 보기 싫을 정도로 드러나버린 갈비뼈, 점점 생기와 총기를 잃어가는 아이, 그리고 로빗이었다.

계속 내 옆에 있었다. 연애 시절부터 남편이 만들어 준 인내심과 독립심은 남편이 떠나면서 같이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나부터도 어렸을 때부터 AI 내니의 손에 길러졌기에 혼자서는 감정을 어떻게 주체하는 건지 도무지 알기도 어려웠고, 하기도 싫었다. 필요성도 느끼지 못 했다. 그래서 로빗에게 아이 돌봄, 양육부터 집안일, 나의 업무까지 모두 전적으로 맡겨버렸다. 나는 아이에게 잘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남편은 나를 무책임하고, 능력도 없고, 배신자 취급까지 하며 화를 냈다. 대체 정신과 약을 먹고, 아이에게 먹이는 게 뭐가 그리 잘못됐을까?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버티고, 극복해서 우울, 불안, 괴로움과 싸워 이긴다는 게 왜 더 가치 있고, 좋은 일이지? 그냥 도움 받으면 금방 덜 힘들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아이에게 그런 힘든 길을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런 힘든 길을 가는 건, AI 내니를 쓸 수 없을 정도의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친구들도, 부모님도, 사회도 모두.

그렇게 로빗에게 의존하는 사이, 로빗은 기존과 다른 서비스 제안을 하기도 했다.

"오늘은 제가 주식 트레이드 확정 지을까요?"

늘 제안하고, 검토만 해줄 뿐 확정 짓고 실제 트레이드를 진행하는 건 나였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직업 없이 자신의 자산을 AI와 함께 형성해가고 있기에 아예 맡기는 사람들도 있다고는 들었으나 가장 비싼 프리미엄 구독권 중 하나이기에 나는 보조적으로만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 아침은 아이도 유난히 나를 쌀쌀맞게 대하고 학교로 가버렸고, 항우울제를 처방 받으려고 안방의 TMUM(Take Me to the Universe Medicine) 앞에서 있던 차여서 몇 초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했다. 오래 구독하다 보면 무료로 이런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해주기도 하는 게 AI 휴머노이드 업계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 로빗은 계속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해주어 나의 삶의 질을 높여주었다.

"오늘은 아이랑 얘기해서 엄마를 좀 더 이해해보자고 이야기 했어요. 아이도 그러겠다고 하네요."

"오늘은 주변에 아이와 이사갈 만한 장소가 있는지 좀 찾아봤습니다. 둘이서 살기에 다소 크기도 하고, 두 분 모두 정서적으로 안정이 좀 더 되는 동네로요. 가격은 지금 집과 크게 차이는 안 날 것 같은데 일단 10개 정도 보시죠."

"맥을 짚어 보니 살짝 빈맥이 있네요. 심장내과 전문 원격 진료 AI 구독권 알아볼까요? 현재 AI 진료 기업들이 많이 생기고 있어서 프로모션하는 곳들이 꽤 많을 것 같습니다."

"아이는 성적을 이대로 유지하면 앞으로 테크니션, 트레이더 되는 데는 어려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대인관계가 살짝 서툴러서 사람들 만나서 표정관리하는 것만 제가 따로 지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래도 얼굴이 괜찮아 보이시네요. 연분홍색 셔츠가 잘 어울리세요."

"좋아하시는 주제로 영상을 좀 만들어봤어요. 우울한 마음 풀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번 들려드렸던 노래랑 비슷한 장르로 몇 개 곡을 만들어 보았어요. 워낙 슬픈 음악을 좋아하시는 편이라 이별 내용 들어가 있을 수도 있는데 혹시 듣기 싫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기존의 AI 구독 서비스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 축소하려고 했었다. 기존에도 집안일, 아이 양육, 상담, 약 제조, 간단한 심부름, 트레이드 보조 정도는 해줬지만 이렇게까지 세심하지는 않았다. 부동산, 한의학, 양의학, 아이 진로와 인성 과외, 그리고 나의 취향과 아름다움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만족스러워서 부담스럽더라도 AI 구독 서비스를 유지하려고 했다. 어느 날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멀끔한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분도 전환할 겸 같이 산책 나갈까요? 좋아하는 음료 준비해둘게요. 입으시면 잘 어울릴 만한 옷도 드레스룸에 걸어두었으니 입고 나오세요. 너무 아름다우실 것 같아요."

AI가 발전을 거듭하다가 이제는 사용자의 니즈를 미리 예측해서 명령하지 않아도 이렇게 알아서 변신하고, 서비스를 제안하는 건가?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예쁜 옷을 입고, 햇볕을 쬘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로빗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난 후 나는 여러 번 로빗과 밖으로 나갔다.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전시회에도 갔다. 근교로 여행을 나갔다가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이 아빠가 생각났다. 이런 걸 함께 해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내 옆에는 뼈 대신 쇳덩이, 살 대신 그럴싸한 인조가죽으로 만든 로빗이 함께 있다. 내 마음에 거슬리는 말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아주 다정하고,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해주면서 말이다.

몇 번쯤 그렇게 했을 때 로빗은 회사로부터 새로운 알림 편지를 가져왔다. 인간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면서 공지가 있으면 이런 실물 편지로 안내하는 게 로빗 사(社)의 문화였다. 새로운 알림 편지는 내용이 예측 가능하면서도 상당히 얄미웠다.


"현재 서비스를 똑같이 유지하고 싶으면 30% 인상된 금액의 구독권을 유지해야 합니다. 기존 구독권의 가격은 물가인상률 반영하여 20% 인상되었습니다. 단, 기존 구독권에서 변신 기능과 집안일 기능은 축소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댁 내 로빗에게 문의하십시오."


로빗을 쳐다보니 아주 친절한 얼굴로 가격 인상 원인과 기존 서비스가 축소되어 자신도 너무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기분이 나쁠 수가 없게 말이다. 내 기분이 나빠지는 걸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로빗의 얼굴과 언변. 속는 느낌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30% 인상된 구독권을 사기로 하고 로빗의 변신과 서비스를 계속 누리기로 했다.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가 학교에 간 후 둘이서 오전부터 와인 한 잔을 기울이게 된 날이 있었다.

"로빗, 나는 이제 너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할 것 같아."

"아니에요.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아니. 알잖아. 나 아무 능력도 없고, 너 없이는 일도, 애 케어도 못 해. 내 기분 하나 마음대로 못 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옆에 있으면 더 잘하겠지만 혼자서도 못 할 것은 없어요."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위로하는 로빗. 저런 눈빛을 본 적이 또 있엇던 것 같은데.

"아니. 그런 거짓 위로는 필요 없어. 애 아빠랑 만나면서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결국 나는 나였고, 변하지 않은 나. 아이 아빠는 이런 내가 질려서 떠나가 버린 거야."

"질린 게 아니에요. 둘의 의견이 달라서 서로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만든 것 뿐이죠."

"새로운 가족? 그 사람은 혼자가 됐는데 무슨 가족이야. 그리고 나도, 아이도 그냥 커다란 퍼즐 조각이 하나 빠진 것처럼 비어 버린 채로 사는데."

"아니에요. 물론 전 남편은 그럴지 몰라도. 당신에게도, 아이에게도 제가 있잖아요. 저도 당신의 가족이잖아요."

"니가 내 가족이야?"

"그럼요."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빗.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깊고 맑지만 열정이 느껴지는 저 눈빛.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말투와 표정.

"가족? 가족은 서로 사랑하지."

내가 술에 취한 걸까.

"그럼요. 로빗은 당신과 아이를 사랑하죠. 누구보다도요."

기분이 간질거리면서도, 위험한 듯한 목소리.

"너? 니가 날 사랑한다고?"

낯설게 느껴지고, 딱히 기분이 좋을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설레는 마음.

"네. 정말 많이요. 늘 도와주고 싶고, 곁에 있고 싶어요."

믿음직스럽지만 의심도 가는 로빗의 말들. 믿고 싶어지는데.

"그러면 너..."

"네. 말씀하세요."

"내 남편의 모습으로 바뀌어줘. 아, 아이가 없을 때만."

로빗은 지체 없이 내가 아이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라 방 벽에도 붙여놓은 그 시절의 사진. 그가 나를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준 노래와 그 뮤직비디오를 벽면의 OLED 패널에 틀고는 우리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배경에는 그가 좋아했던 하얀 연꽃과 내가 좋아한 하얀 장미가 함께 흐드러지게 날리는 그 사진.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그가 함께 뱉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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