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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na 이나 Jul 02. 2023

내가 한국을 떠나온 과정 (1)

한국에서 호주로, 그리고 네덜란드로 오게 된 계기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유는 다양하다. 유학, 현지 취업, 결혼 등,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의 계기가 있다. 나 역시 돌이켜보면 남들과는 조금 다른 여러 계기와 이야기들이 모여 나를 여기로 이끌게 된 것 같다.




서울, 더 큰 세상에 대한 동경

나는 한국의 지방 지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살다가 학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혼자 올라와 서울에서 취업을 하고 살아가던 지극히 평범한 토종 한국인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있었던 세상은 참 작았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SNS가 발달하기도 전이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인생을 사는지 알기가 비교적 어려웠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주변에서 봐온 삶의 형태는 무서울 정도로 획일적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는 인문계와 실업계 (지금은 전문계라고 불리는)로 나뉘고, 성적이 받쳐줘서 인문계에 진학한 학생들은 밤 10시까지 매일 야자를 하고 수능을 본 후 대학에 들어간다. 이 과정이 그 당시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 본 인생 로드맵의 전부였다.


그런 전형적인 한국 청소년들의 인생 로드맵과 달리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꽤 좋아했던터라 항상 예고에 진학을 해서 만화가나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었다. 그 당시에 네이버 블로그를 참 열심히 했었는데, 그림을 좋아했던 나는 블로그에 꾸준히 그림을 올리면서 온라인으로 친구들을 사귀고 서울에서 하는 행사에서 그 친구들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 푼돈을 모아 중학생의 신분으로 혼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접했던 서울이라는 도시는 나에게 정말 크고 멋진 미지의 세계였고, 그것이 내가 있던 터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혼자 여행했던 첫 발걸음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그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아이돌에 빠져서 이 전에 서울을 혼자 몇 번 왔다 갔다 해본 기지를 발휘해 혼자서 콘서트를 보러 서울에 올라갔다. 이런 나를 보고 학교 친구들은 '혼자서 서울을 가다니 용감하고 대단하다' 하며 놀랐고 부모님은 서울은 여기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라며 걱정을 하셨다. 나는 그때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서울에 가면, 지금 이 지역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수많은 경험들을 만끽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 오는 설렘의 감정이 나에겐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더 컸다. 고속버스 안에서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디자인과로 대학교 전공을 확정하고 나서부터 나는 무조건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남들보다 입시 미술을 훨씬 늦게 시작해서 실기 점수가 형편없었지만, 수능 성적을 믿고 가, 나, 다군을 모두 서울 및 수도권 대학으로 원서를 넣는 무모한 짓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 당시의 나는 대학 간판보다 서울에 가는 게 더 우선순위였고, 대학에 가는 목적 중 하나가 이 지역을 떠나 상경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관의 확장

대학교를 수도권에서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서 취업을 하고 자취를 하는 몇 년 동안, 나는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계를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가지고 사는지도 듣게 되었고, 해외로 단기간 체류하며 공부나 일을 하고 돌아오는 몇몇 친구들을 보게 되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오로지 서울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던 나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이 아닌 그 보다 훨씬 큰,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며 해외 생활에 대한 로망은 커져갔지만, 당장 내 수중에는 그런 엄두를 낼 금전적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우리 집은 유복하기는커녕 형제자매도 상대적으로 많아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항상 돈 걱정을 하시는 것을 보며 자랐고, 때문에 한때는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그리 넉넉하진 못한 형편이었다. 때문에 유학이라던가 어학연수, 하다못해 해외여행 경비를 지원해 줄 상황은 당연히 못되었다. 내가 가 본 해외여행이라고는 잠깐 휴학하고 번 돈으로 일본으로 4박 5일을 갔다 왔던 게 전부였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언어였다. 나는 평생 언어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능 공부할 때 말도 안 되게 처참한 영어 점수를 회복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안 되는 기초를 쌓으려고 중학교 수준의 영어부터 시작해서 단기간에 성적을 많이 올린 경험은 있었지만, 그건 단지 시험만을 위한 목적성이 뚜렷한(?) 영어 공부였기에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다시 영어공부를 손에 쥐는 일은 없었다. 중학교 때 일본 애니메이션에 푹 빠졌을 때 일본어에 잠깐 관심이 가긴 했지만 워낙 끈기가 없는 성격이라 제대로 공부한 적은 전무했다.


이랬던 내가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해서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에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내가 당시에 다니던 디자인 회사였다.


어느 여름날의 암스테르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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