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별안간 들린 소리가 유난히 크게 짧게 울렸다. 거실에서 동생과 막 시작하는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만화 주제가보다도 더 크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고, 집안은 고소한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만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창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할머니가 우리를 부르며 밥 먹자 하셨고, 그 순간 ‘에엥’—하고 울린 사이렌 소리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할머니를 따라 베란다 창틀에 올라가 겨우 내다본 저만치 먼 아래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구급차가 하얀 천을 뒤집어쓴 누군가를 들것에 싣고 있었다. 한 번도 뛰는 걸 본 적 없던 경비 아저씨가 부리나케 달려가는 뒷모습도 보였다.
“어머, 세상에…”
할머니는 몇 번을 이 말만 되뇌셨다.
‘창틀에 올라가면 안 된다’ 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지만 나는 내려올 수 없었다. 만화는 악당이 등장하는 클라이맥스였지만 그보다 더 현실적인 ‘무언가'가 지금 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결국 그날은 조금 식은 국으로 저녁을 먹었다. 아빠와 할머니는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눴다. 난 대부분의 대화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단지 그날 저녁,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어떡해'라는 것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을 때, 건물 입구 바닥에는 까맣고 얼룩진 흔적이 있었다.
그 위로 덧칠한 듯 희미하게 번진 하얀 페인트 선도 눈에 띄었다. 밟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본능처럼 들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얼룩을 피해 다녔다. 혹은, 일부러 밟기도 했다.
“밟으면 저주 걸린다.”
“귀신 붙는다.”
그 말에 웃으며 달리고 소리 지르고 미끄러지며 장난을 쳤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던 우리에겐, 그 얼룩은 단지 놀이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날 저녁,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 아주머니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걸 들었다.
“사람 떨어지는 거는 그렇다 쳐도 이러다 집값 떨어질까 봐 무섭다니까.”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사람이 떨어졌구나.
그게 바로 말로만 듣던 ‘자살’이라는 거였구나.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던 그 단어. 그게 바로 그날 일의 이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얼룩 위를 밟지 않았다. 멀찍이 피해 다녔다.
“밟지 마.” 동생에게도 신신당부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 얼룩은 더 이상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 일에 대해 다른 어른들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엔 평소처럼 평소와 같은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개똥을 치웁시다’, ‘주차를 바르게 합시다’, ‘쓰레기는 분리해서 버립시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사람이 죽었지만 아파트는 평온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침묵은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예의였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협조적이었다. 얼른,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대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얼룩은 사라졌다.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찾은 옛 동네에 모든 게 변해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변하질 않았고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뉴스에 자살 관련 뉴스가 나오면 가장 먼저 그 검은 얼룩이 머릿속을 관통한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그날 창밖을 보이던 그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동안 아파트는 더 높아졌고 집값은 더 치솟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보다 중요한 건 그 집의 ‘가격’이다.
죽음은 일시적인 불편이 되었고 생명은 시세표의 한 줄에도 오르지 못한다.
가장 두려운 건, 이런 세상이 너무나 당연해진 지금이다. 집값이 무너지지 않는 한, 사람의 추락쯤은 곧 잊힐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그곳을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