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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중현 Dec 02. 2023

인공지능이란 인간의 핑곗거리일 뿐

인간은 책임회피를 위해 발명하고 무너뜨린다


난 정말이지, 하루도 농업, 식량, 기후 이런 키워드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는 것 같다.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일 때도 있지만, 그와 같은 긴장을 할 수 있는 것도 공부하는 사람이 겪어야 할 일이고, 오히려 그것은 몸으로만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사치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행한다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에 가깝다. 행하면 보게 되고, 보면 알게 된다. 심지어 인공지능의 학습법도 그에 가깝다. 가만히 앉아서 몇 개의 데이터와 산발된 경험으로 축적된 직관에 의존한 것을 '관록'이라고 하면서 살던 때는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저 위에서 높은 계층 또는 계급에 있는 분들이 '인공지능'에 더 열광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말 충직하면서도 능력 있는 집사를 두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정해주는 바운더리 내에서 결정하고 살게 되는 세상이 이미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조차도 어떤 법규나 금전으로 조절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어떤 인간은 더 효율적인 이익을 보고 살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기계들의 세상(인공지능보다 '기계'라고 하고 싶다. 이미 '인공지능'이란 단어 자체가 너무 의인화되어 생각을 전개하기가 너무 어렵다)에서, 인간이 기계를 아래에 두어 집사로 생각하든, 위로 두어 신으로 생각하든, 이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이 신성하든 교만하든 상관없이, 어떤 권력을 쥐게 된 인간이 행하게 될 유일한 수단은 '책임회피'다. 그것이 종종 신이며, 왕이며, 제도의 허점이었다. 그렇게 핑계를 대고 그것을 세웠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 성경의 바벨탑은 스스로 무너졌다고 생각하곤 한다. 신이 그것을 보고 노여워했다던데, 중세 시대에 그려진 바벨탑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상상력에 갇혀 있었나 생각했었다. 그것보다 훨씬 높은 바벨탑을 진작에 올렸지만, 인간은 지금도 건재하다. 


중세 유럽의 바벨탑 상상화[1], 플랑드르 화가 대 피터르 브뤼헐, 1563년 작


어떤 수준의 상상력이든, 인간이 멸망하게 될 이유로 분명한 한 가지는, 그것을 이용해 어떤 목적을 취하든, 그것을 이용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안에서 '자기'를 '자기'가 배제하였을 때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절차적 단계에서, 이해자를 배제하곤 한다. 가끔 그 장치가 이상하게 작동하곤 하는데, 그것 또한 제도에 과도하게 의존하여, '인간의 자기 결정 능력'이 제도에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그 어떤 것보다도 정해진 룰에 따르거나, 스스로 내재화시키는 시스템에 철저하게 기반하여 어떤 룰을 우리에게 강제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기'가 삶에서 배제된 시간은 수면의 시간이고, 잠의 끝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죽었다고 한다.


농업과 식량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와, 온전한 농업을 영위하기 위하여, 그 안에 우리가 있는지를 돌아보아야만 것임을 잃고 있지 않나, 혹시나 너무나도 도구에 천착한 결과, 결국 우리 사회와 삶을 상실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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