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제되었다. '구제되었다'가 맞는 표현이다. 나의 과제가 연구비 삭감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기관의 우수 연구과제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24년 연구재단 3 과제, IPET 1 과제, 교내과제 1 과제를 직접 지원하고, 그리고 또 다른 과제에 이렇게 저렇게 참여 제안서를 내는 과정에서, 가슴이 답답하고 심한 우울증이 지나가는 경험을 하였다.
그런데, 표현 그대로 '구제되었다'. 흘러가는 강물에 띄워진 6개가 넘는 구명줄, lifeline, 을 잡았고 우선 살아났다. 그렇게 기다리던 사이, 우리 연구실은 무너져갔고, 2024년의 실험은 무의미했으며, 학생들은 방황하고 일부는 떠났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연구자들의 도덕성과 비전이 시험대에 올랐다.
외국인 학생들은 심한 향수병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고용 연구원들은 도덕적 도전을 경험했다. 일부는 실제로 매우 실망스러운 행동을 하였고, 그나마 남은 적은 연구재원은 그야말로 무의미하게 탕진되었다. 의욕 있는 연구원과 학생은 없었다.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난파선 선장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호흡이 긴 육종학을 지속해야 할까. 인기 없는 식량 연구는 그만두어야 할까. '세상이 원하는 학문'과 '정부가 원하는 학문'의 그 큰 차이는 실재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이 끊어지질 않았다.
정부가 앞장서서 찍어버린 '낙인효과'로 인하여, 앞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사실 나로부터 기인하였던 것이다. 정부에 의하여 '필요 없고', '과잉투자되었고', 심지어 '부패의 온상인' 그런 것을 학문이라고 붙잡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한국을 떠날 생각을 했다.
마지막 남은 두 명의 학생. 멍청해서일까 착해서일까. 그중 한 명은 필리핀에 돌아갈 직장이 있다. 나에게 한번 살짝 물었다. 석박통합과정을 들어온 학생이 석사과정으로 전환할 수 있으면 어떻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 친구는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나 스스로 던져야 할 문답의 순간이었다.
네팔에서 온 학생. 네팔에 한국인들이 설립한 신학대학이 있다. 남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하는 학교이다. 신학대학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인도권 국가들의 종교 정책의 변화로 확장에 큰 위기를 겪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교회의 지원도 어려워 보인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것은 자구책. 그래서 농업연구소 설립을 꿈꾸고 있으며, 대학 총장님과 협의하여 유학온 학생이 있다.
두 친구 모두 묵묵히 열심히 살아주었다. 그 폭풍의 시간에도 해남을 오가며, 경기도농업기술원을 오가며 땀을 흘려주었다. 나를 믿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나쁜 선생이다. 아마도 연구재단의 그 두 과제가 선정이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한국을 떠날 짐을 싸고 있을 것이다.
외국 몇 국가에서 우수 인재를 유치한다는 소문은 사실이다. 나도 몇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의심스러운 편지도 있었지만 꽤 진지한 내용도 있었다. 그러한 내용에 마음이 흔들릴 과학자들과 교수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실제로 떠난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거절당하는' 그 고통은 표현이 잘 안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소용돌이와 폭풍 안에서 아픔이라기보다는 무기력과의 싸움에 시달려서 괴롭다. 50년을 넘게 살아도, 수없이 당했던 거절이라 할지라도, 또다시 경험하는 거절은 괴롭다. 그런데, 늘 그랬듯이 거절하는 쪽은 무심하다. 아니, 무심함을 결심했을 것이다. 수없는 결정의 단계에서 양심은 희석되고 오로지 문서화된 무심함만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시스템화된 무심함의 결과를 나는 묵도했던 것일 테다.
여전히 그 거절의 시간을 경험하는 수많은 연구원들 앞에 웃음만으로 응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올해 과제제안서를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과제제안서를 도왔다. 그게 맞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거절의 잔상은 파문이 되어 남아 있다. 연구실을 회복하고 복구하는 과정은 더디다. 떠나버린 학생들과 연구원들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은 많은 데이터와 재료의 손실을 가져왔다. 행정적인 처리를 하기 모호한 것도 많이 보인다. 연구의 단절이 실제가 되었다. 떠난 사람들은 단호했다. 연락을 끊거나 연락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리와 복구는 모두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규정은 복잡하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또다시 연구자들의 희생이 동원된다. 규정이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모든 단계와 절차는 눈을 부라리며 여전히 과학기술자들을 의심하고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는 데 변함없다. 연구비를 받아도 연구비로 처리할 수 없는 많은 항목이 복구비용이다.
논문의 질적 향상? 논문 한 편 쓸 학생도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AI의 발전인가, 과학자의 양성인가. 철학도 사회도 인간미도 없어진 과학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AI는 그냥 기술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 연구하는 세상을 말한다. 인간은 불합리하며 불공정하고 예측불가능한 존재이기에, 효율화된 시스템에서 관리자에게는 모순적인 대상이다. 기계와 데이터는 그것을 보완해 줄 것인가, 대체할 것인가. 이제 대체의 순간이 다가왔다.
재작년부터 시작되는 R&D 구조조정의 광풍은 세상을 휩쓸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셈이다. 과학기술자들이 제안하는 수많은 아이디어는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며, 사회적으로 불공정하기에 거부되고, 조직화된 기계적 데이터의 결합이 그토록 인간들이 바라던 '예측의 권력'과 '지속가능한 안정성'을 구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전지전능하며', '영원한' 것이다. 그것을 '신'이라고들 부른다. '우리가 신을 창조했으며, 신과 같다'.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이다. 언어 불소통이 의미 없는 세상이 되며, 세상이 매우 빠르다. 다 어딘가에 기록된 표현이다. 과거에도 수없이 많은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그러한 과학기술의 영역도 언제나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눌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적으로 인간이 주도하던 권력을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예수를 능가한 권력을 구사하는 자본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제 자본과 권력이 결합을 한 실체가 드러나도 사람들은 별 대응을 할 수 없다. 무엇인가 이상한데 이상하다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나마 살아남은 지식은 주류에서 벗어나 SNS와 유튜브의 한 구석에서 남은 숨을 고를 뿐이다. 그것에 환호하는 지식게릴라들끼리의 '자뻑'으로 '아날로그'로 조용히 사그라질 것이다.
대체된 새로운 지식 체계는 인류에게 희망이 되어줄까, 소멸을 알려 줄까. 인간의 육체는 영원하나 존재는 소멸할까? 소멸된 존재의 불멸의 육체는 우리의 전설과 신화 속에 남아있다. 우리는 그것을 지옥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8 지옥은 불의 지옥, 9 지옥은 동결의 지옥으로 영원한 시간 속에 고통만 느끼는 육체의 공간이라고 한다.
너무 깊이 들어갔다.
2025년에 우리 연구실의 식구를 세어보니, 13명이 넘어갈 것 같다. 나는 앞장서서 동남아교육연구기관인 SEARCA와의 협정을 끌어내어, 우리 대학 대학원을 진학 시 등록금을 포함한 여비와 지원비, 생활비까지 전액 지원 방식을 끌어내었다. 연구비 수주와 이 장학시스템의 도움으로 3명의 학생을 추가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원이 4명이 있다. 전부 중장년층이다. 논문이 급해서 써봤던 포닥들에게 전부 실망했다. 이삼십 대에 겪는 광풍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연구실에서 학생들과 타인에 대한 배려 측면에서 어느 하나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뽑지 않기로 했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그것이 논문뿐만이 아니라, 과학계 더 나아가 소사이어티의 일원이 되고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배우지도 못했고 잊어버린 것 같았다.
결국 그나마 아날로그의 시대에 인간적으로 부딪껴가며 서러웠던 분들이 더 낫다. 40대가 넘어가면 그런 경험쯤 한두 번 안 해 본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모셨다. 전부 대단하다. 학생들이 안정을 찾고 지혜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하고 있다. 난 작년에 논문 편수를 희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심사장에서 질책을 해도 좋다. 난 사람을 키울 것이다. 그리고 배부른 학생이 아닌 배고픈 학생을 키울 것이다.
'키운다' -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표현이다. 키움에는 공감과 인내가 절대적이다. 간섭하지 않되 관심을 갖는 것이 양육의 핵심 철칙이다. 나와 닮은 자가 아닌 그들의 선생이자 반면교사가 되어 살아 주는 것이 키우는 것이다.
나의 배고픔이 유전되어 그들의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죽음을 지연시키지만, 농부는 생명을 준다'는 생각을 함께 실천하는 것이 우리 연구실의 모토다. 세상의 무심함에 죽을 뻔했다고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다.
세상은 무심하고 그 무심함이 '신'의 속성이다. 알 수 없는 원리가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종교인들이 있다면 따를 이유가 없다. 어느 인간 하나도 자신이 던진 부메랑을 피할 자가 없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그 사실을 알면 된다. 알면 그냥 피하면 된다.
'리더가 되었다' - 나는 리더가 되었다. 20대에 부러워했던 그 리더 말이다. 형식적인 리더를 넘어서서, 리더의 본질을 심판받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실을 내가 느끼기 시작했다. 두렵다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살면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건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 학생이 시스템화된 무심함에 별것도 아니었을 일에 희생되었다. 난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줄 수 없다. 오히려 난 그 학생이 변화할 시간이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욕해봤자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은 강요되었다. '박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 학생은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나보다도 더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나서지 않기로 하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인생 경험이 많은 연구원들은 나에게 좋은 힌트를 주었다. 그 친구의 진심을 느끼고 있다. 성장과 변화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 내가 지금 할 일은 그 친구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교육의 목표다.
'우월한 리더'가 될 것인가, '좋은 리더'가 될 것인가.
국제벼연구소에서 칭송을 받던 Dr Hei Leung이 있었다. 식물병리학자였던 그는 연구소를 뛰어넘어 국제적으로 식량 연구와 발전하는 유전체학 연구를 접목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분은 한번 나의 발표를 듣고는 한 말씀하셨다. 'You are a Thinker.'
그 말은 내가 공부해도 된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분이 나에게 또 다른 많은 말을 했겠지만, 나의 학자로서의 여정이 끝나지 않게 한 말은 딱 저 말이다. 농부뿐만 아니라 농학자는 생명을 연장해 준다. 학자로서 말이다.
내가 국제벼연구소의 부소장과 과장을 포함한 계약 연장 면담 장소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구조조정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풍문은 기괴했다. 어느 호텔을 하나 잡아서 살생부를 작성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고, 그림의 빈칸을 채우지 못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 그런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도 했고, 심지어 인종차별이 자행된다는 말도 들었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 모든 시작의 트리거가 '예산삭감'에서 출발된 상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출신의 많은 과학자들이 그만두었다. '효율화'는 다른 의미를 함축할 수 있다. 그들이 말했던 명분들은 다 의미 없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오래 일했다, 특정국가와 친하다, 인도와 가깝지 않다'.
나는 응대했다. '육종과장인 너는 3년간 논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나와 함께 본 적이 있느냐, 그래 나 인도 사람들과 안 친하다. 그게 왜 이유가 되냐(실제로 내 첫 보스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Dr Brar다. 화가 나서 쓴 반어법이었다). 한국 과제를 수행하는 게 특정 국가 친화냐.'라고 했다.
결정되어 있었다. 열받은 나는 응수했다. '너희들은 쌀 팔지? 우리는 쌀을 먹어.' 며칠 뒤에 연구소를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연구소는 워낙 그레이스 한 곳이어서, 나에게 6개월간 동일한 조건으로 임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음 일자리를 알아볼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기르는 식물에 다가갈 수 없었으며, 더 이상의 모든 회의 참여가 무의미했다. 한 번도 제대로 놀지 못했던 나는 그냥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웠다. 단 한 번 미국의 한 대학에 원서를 내었는데, 소문 때문인지, 우리 기관에서 세 명이나 지원했다며 모두 뽑지를 않았다(작년에 가 봤는데, 지금은 안 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Dr Hei Leung이 만나자고 했다. 내 소식 들었다며,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며. 그러면서 옛이야기를 해 주었다. Dr David Mackill과 친구인 Hei는 연구소의 리더로서 방향성을 어떻게 정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우월한 리더'가 될까, '좋은 리더'가 될까. Hei는 내가 바라는 답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행복했구나, 아 그래서 내가 이 기관에 오고 싶었던 것이구나. 그리고, 내가 길을 걸을 때 웃을 수 있었구나.
사람들은 천재가 발굴되길 바란다. 그러나, 천재는 역사적으로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한편, 사회는 천재가 더 많은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시간을 뺏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천재를 두려워하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젊은 천재는 재앙을 겪는다.
천재를 키우려면 천재들이 길을 걸으면서 웃게 해야 한다. 그것은 '좋은 리더'만이 할 수 있다. 지금 나는 Hei의 미소가 기억나고, 그의 격려가 기억난다. 내가 한국 국적의 국내 박사로서 드물게 국제농업연구기관의 스텝(책임급 연구원)이 되자, 지나가던 기후변화 연구의 권위자 Dr Reiner Wassman이 'Hey, genius!' 했던 기억이 난다. 굉장히 부끄러웠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그 전날 독일인들끼리 참 술도 많이 먹었다 생각했다.
Reiner가 왜 날 그렇게 불렀을까 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속이 궁금했다. 나는 누구를 보고 저렇게 부를까? 훌륭한 논문을 쓰는 사람? 성과가 좋은 사람? 재치가 넘치는 사람?
지금 이 시점의 생각을 기록해 둔다. '길을 걸으며 웃는 사람'. 우리 연구실의 학생들이 모두 이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나에게 lifeline을 던져 준 동료들과 내 운명에게 진정으로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