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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붕괴의 메커니즘에 대한 사심(사사로운 생각)

생각의 끝에 이르니, 적절한 분열이 답인가... 하는 질문이.

by 진중현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라는 책을 낸 지도 6개월이 넘은 것 같다. 인간됨, 신성함, 그리고 그 뒤에 자리 잡은 것은 결국 정보. 커뮤니케이션의 힘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데, 그 능력치가 임계점을 넘어갈 때마다 인간은 정보의 힘을 빌렸다. 바로 예측과 그것을 근거로 한 판단력. 판단의 권위는 '신성'을 부여한 것이라면, 결국 그 신으로서의 권위는 '정보'의 힘인 것이다.


그것이 권력일지, 재력일지 몰랐지만, 실제로 무력에 근거한 권력, 생산 기반 확보에 뿌리를 둔 재력을 능가한 힘이 바로 '판단하는 능력', 즉 정보력이었던 것이다. 이 생각을 더 확장하자면, 현대 우리 세상의 리더십 붕괴를 촉발하는 사건들이 대부분 '거짓말'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가짜 뉴스'라는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타락한 지식인들의 헛된 가르침, 설익은 기자들의 사실 확인 없는 기사, 편향된 종교적 지도자, 화합을 선택하기보다 분열을 촉구하는 정치적 리더 등의 배경에는 모두 우리 사회가 정보를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막막했다. 그저, 국제적 리더들 간의 분쟁 정도로 이해했다. 왜 사람들은 강력한 권위주의를 선택할까. 지금 세계의 각처에서 '표현적' 민주주의를 시행하며, 실제로는 '권위적' 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적어도,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덜 권위적인' 리더를 뽑을 뿐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선거 중 상황만 보아도, 국민들은(아니 시민들은) 상대의 '권위적인', 또는 '독재적인' 리더십을 집중 공격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정쟁은 상대 리더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집중되었는데, 이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니, 오히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가장 관심 있게 봐야 할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의 '리더십'에 큰 결함이 생긴 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로 이야기를 바꿔 보겠다. 판단을 잘하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충분한 지식과 경험?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오히려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은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편견'이라고 부른다. 특히 변화가 심하여 예상치 못할 상황에 대한 것에 전문화된 판단을 내려야 할 정치가라면, 경험보다는 '합리적, 추론적' 사고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훈련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확보할 때 가능할 것이다.


한 가지 변수가 더 있다. 바로 '제한 시간'이다. 합리적이고 추론적 사고가 발달했더라도, 결정의 시간이 늦게 찾아오면 제대로 된 결정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훌륭한 판단은 '제한 시간에 결정해야 할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결정'이 될 것이다. 꼭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수학 문제 잘 풀기 위해 필요했던 능력처럼 들린다.


세상은 과거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밀하면서도 빠르게 변화한다. 물리적으로 보면 이처럼 모순적인 것이 없다. 정교하고 세밀하려면 천천히 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과학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특히 정보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물리적으로 엉성할 수 있는 부분에 질서를 부여했다. 꼭 생물의 세포 발달이 무작위적인 우연의 결과에 더하여, 다층적인 관계 정보에 의하여 생명체로 완성되는 것처럼, 사회도 그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회의 정보기술은 세포의 DNA 정보처럼 작동했다. 그럼, 한번 이야기를 다시 한번 틀어보자. 처음의 세포는 감각이 있었을까? 외부 정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 생존의 결정을 내렸을까. 아마도 처음에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외부의 주어진 자극에 대한 반응. 이것이 가장 일차적인 신경 생성의 유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속적이고 규칙적인 반응은 어떤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에 대하여 생존력이 좋은 세포들은 '학습'을 했을 것이며, 그 학습의 물리화학적 결과물로 '핵산'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세포 외부와 세포 내부의 수많은 생물화학적 메커니즘이 '정보화'되어 응축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포에 소위 '결정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세포가 조직이 되고, 조직이 기관이 되며, 기관이 모여 개체가 될 때, 그것은 모두 수학의 '멱집합'처럼, 각 원소들을 규정하는 다차원적 '멱함수'의 구조로 발전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양파 같은 생명 정보 구조를 밖에서 까들어가면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 개인은 사회의 폭발적인 '정보적'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 지체 현상을 이미 19세기의 근세 과학자들이 '아노미'라고 불렀듯이 생소한 현상은 아닌데, 사회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의 판단 능력에 한계점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결정 구조는 그 절차가 어떻든 간에, 결국 1인을 대표로 한다. 그리고 그 1인은 (실제로) 몇 참모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이 구조는 기업이든 국제기관이든 심지어 학급이든 상관이 없다. 모든 조직의 결정은 결국 1인이 하게 되는 구조다. 다원적 결정 구조가 몇몇 시행되는 기업, 조합 등이 존재하지만, 개인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학교, 행정조직, 국가, 종교, 그리고 병원과 같은 서비스(움베르트 에코가 떠오르지 않는가) - 즉 모든 공공서비스는 1인 결정 구조로 귀결된다.


공공서비스 결정 구조의 한계를 '글로벌 리더십의 한계'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한계는 1인 결정 구조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결정 시간'의 한계다. 민주적 절차는 결정 시간을 무한정 늦출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모든 논점을 검토하고 합리적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그 사이에 균열을 확장되고 분란의 씨앗은 싹을 틔웠다. 그토록 사람들이 칭송하는 '민주주의'가 결정적으로 '반민주적' 행태를 더 많이 보호한다는 모순을 너무나 자주 목격하게 된다.


급기야, 몇몇 공상과학에서는 결정을 AI에게 맡기자고 하는데, 우스개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결정'이라는 공공서비스의 '품질'은 그것의 시기적 적절성에서 특히 위기가 다가왔다고 볼 때, 세상의 변화에 더 빨리 대응하는 결정 구조가 필요해진 것이고, 사회 불안의 저항력이 민주주의 안정의 내구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급한 판단이 누적될 확률은 이미 아주 높다. 개인들은 수많은 정보를 그저 빠르게 학습한다. 결정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업무가 고도로 batch(배치)화되었기에 그 안의 본질을 살필 여유가 없다. 조직의 상단에서 모든 것을 살피고 판단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하부의 각 개인에게 누적된 불만은 불신을 키웠다. 그것을 해소할 방법이 하나 있지만, 과연 가능할까?


그것은 '분리주의'다. 다시 국가별 장벽을 쌓자 한다. 각 지역들이 분열된다. 계층과 계급이 분열한다. 결정에 불복하니 모두 각자 따로 있자고 한다. 이 시점에 생각이 도달하자니, '분열주의'가 오히려 해결 방법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관대하게, 세상의 모든 분열과 각자로의 회귀를 인정해야 할 것인가.


그 도구는 무엇인가. 아마도 이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엉키는 시점이 되었다. 인과관계의 뒤엉킴이 모순적으로 보였던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게 한다. 발달된 정보 시스템이 촉발한 '세계주의'의 긴장감을 해소할 해결책으로서, '탈권력화'를 추구할 정보 시스템의 출현을 요구한다. 다핵화된 구조 간의 특별한 '소통의 권력'이 권력의 핵심이 될 것이다.


분리화된 권력의 핵심 권력은 '외교적'이며, '소통적'인 권력이 될 것이다. 정보는 더 세분화되어 분류(classified)될 것이고, 그렇게 '모르는 게 약'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매트릭스(matrix)'안에 갇히는 것이 아닌가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그 중간 어디쯤인가에 있겠구나 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면서 느끼는 그 수많은 기시감들이 이렇게 다층적이고 모순된 인과관계의 얽힘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은 일이 작지만은 않고, 큰일이 크지만은 않은 것은, 세상에 불변한 것은 나와 세상뿐이기 때문이며, 그 안의 수많은 사회 시스템은 언제든지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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