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망하는 것'에 대한 고찰, '상식'과 '양심'이란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요즘 자꾸 묻게 된다. 왜 세상은 이렇게 빨라지고, 불안해지고, 시끄러워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사실 문명은 과거보다 훨씬 안전해졌다. 사회 안정성을 확보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며, 서로의 차이가 가장 적은 시대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커진다. 아마도 자유도 평등도, 그 외의 많은 아름다운 단어들도 ‘수확체감의 법칙’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의 자유는 눈에 띄게 삶을 바꾸지만, 그다음의 자유는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훨씬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나는 이 생각이 때로 제국주의를 합리화한다고 느낀다. 미국은 역대 최강의 제국을 구축하는 양상이다. 오늘 페이스북에서, 세상을 세 개의 나라가 이끈다는 가정으로 만들어진 지도를 봤다. 어떤 한국계 미국통 학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세상에 자유를 확고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관대한’ 제국이 건설되기 위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영웅들은 작은 목숨들을 소홀히 했다. ‘인류애’ 또는 ‘조국애’, ‘신의 이름’ 아래, 숭고한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사람의 고통과 죽음이 통계처럼 취급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늘 반복되었다. 영웅들에게 “세상이 망한다”는 말은, 세상을 하나의 힘으로 통치하려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역경과 좌절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강물의 소용돌이에서 겨우 나뭇가지 하나에 버티는 개미 같은 서민에게, 그 말의 의미는 다르다. 우리에게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소소한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성실하게 일한다고 해서 부유해질 수 없는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성실해서, 사회의 변화 속도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어느 순간 ‘무지해져서’ 망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진짜 자본의 속성을 너무 늦게 알아서 망하고, ‘자유’와 ‘평등’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변질되어 상대를 탄압하고 죽이는 용어였다는 것도 너무 늦게 깨달아 망한다.
가치가 무한히 큰 것은, 때로 가치 없음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측정할 수 없고 숫자로 계량할 수 없는 것의 가치는, 이 사회에서 무한히 0으로 수렴한다.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을—나는 그것을 ‘암흑물질’에 비유하고 싶다—우리는 너무 쉽게 무시한다. 그리고 그 무시 때문에 망한다.
‘세상이 망할 것 같은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여러 번도 경험한다. 나는 살면서 하늘색이 변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운영하던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다. 내 차에 치인 오토바이 운전자가 슬로모션으로 보넷에 떨어지는 것도 봤다. 동승했던 아내도 그것을 함께 봤다. ‘소신 발언’으로 그만두게 되었던 국제기관을 떠난 뒤, 며칠이 지나며 이상과 현실의 큰 괴리감을 느꼈다. 세상이 망해 버리길 바란 적도 있다. 그때는 정말로 그랬다.
그러나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45억 년 정도로 추정하고, 태양계의 나이도 그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태양은 앞으로도 50억 년 정도 더 살 것 같다니,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세상’은 우주 앞에서 생각할 가치도 없을 만큼 작다. 오히려 우주의 나이만큼 중요한 것은, 관찰자인 ‘나’에 의해 결정되는 ‘세상’이다. 현실은 우주에 속하고, 인식은 나에게 속한다.
다만 아직도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왜 ‘상식’이 존재하고, 왜 ‘양심’이 때때로 먹혀드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아주 떨어져 있지도, 아주 붙어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상식과 양심으로 오늘을 버틴다. 가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내가 당장하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복기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서로의 삶의 결정과 순간을 연결하는 ‘맥락’을 복기한다. 이것을 ‘meme’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안다. 어떤 엄청난 정신력의 소유자라도 세상이 망하는 환상과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이유는, 개별의 생각에서만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시대의 맥락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맥락이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아간다.
어찌 되었든, 이미 세상은 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으로서 일상을 지배하는 외부의 힘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규제와 법률은 ‘최소’의 영역을 벗어나, 굉장히 적극적인 것이 되었다.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해도 오히려 각종 법률에 의해 범법자가 되는 사례가 생긴다. 그 사례는 순식간에 번져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빠르다, 빠르다 하는 세상이다.”
이해와 관용을 넘어, 하나의 통일된 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가 자주 무시하는 개인들 간의 공통분모—양심과 상식—에 흥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것은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고, 신기하고 희소한 것이 비싸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운 평범함보다 ‘신기한 못된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 모든 생각의 기저에는 분노와 원망이 있다.
나는 옳은데 너는 틀렸고, 그래서 질서를 잡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 흰 머리칼의 석학 풍모를 가진 사람조차 ‘증오’에 바탕을 둔 반인륜적 행위를 오로지 ‘질서’의 언어로만 서술하는 것을 보고, 나는 한탄하게 된다. 나에게 세상이 망하는 것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도 점점 가난해지는 것. 하고도 싶지 않고 보고도 싶지 않은 생각을 주입당하는 것. 나의 존재가 세상에 불필요해지고, 불만의 요소가 되는 것.
성경책을 포함한 많은 종교 경전들은 다양한 레토릭으로 세상의 종말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 책을 읽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종말을 비유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요즘처럼 죄책감을 느끼는 적이 없다. 열심히 사는 것도 그 감정을 희석시키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세상의 큰 흐름과 ‘유행하는 분노’는 이미 세상 종말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망한다면, 다만 그 고통의 크기가 작기만을. 나는 모두에게 그렇게 바랄 수밖에 없다.